성삼문이 14세 나던 해인 세종 13년(1431) 7월 2일 그의 조부 성달생
(1376~1444)은 56세로 함경도의 군사권을 전담하는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종2품)가 되어 함경도로 부임해 가는데, 다음해 세종 14년(1432) 1월 29일
에는 성달생의 사촌 아우들인 성엄과 성억(1386~1448) 형제가 성달생이
거쳤던 벼슬인 우군총제와 전라도 관찰사에 각각 임명되어 성씨 집안의
영화는 계속된다.

이 해 3월 18일 성달생은 중추원사(종2품)를 겸하고 4월 25일에는 길주목사
를 다시 겸하게 된다.

함경도 변방의 통치권까지 모두 성달생에게 맡긴 것이다.

세종 15년(1433)은 성삼문이 16세 되던 해이다.

이 해 10월 2일에 세종은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철원평야로
사냥을 떠난다.

말이 수렵이지 사실은 군사훈련(강무)이었던 것이다.

이 사냥 도중 10월 4일 매를 놓아 고니(천아)를 잡다가 왕세자의 말이
진흙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때 사냥에 겸사복의 벼슬로 시중하고 있던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어 왕세자와 말을 구해낸다.

그러니 세종과 왕세자가 성승의 충성심에 얼마나 감복하였겠는가.

뒷날 문종이 되는 왕세자가 20세 때의 일이었다.

그래서 성승에게 활 한벌을 상으로 내려준다.

이때 김종서도 좌승지로 호종해 있다가 이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이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11월 10일에 성승의 당숙이자 성녕대군의
장인인 성억을 하성절사의 정사로 삼아 명나라로 보낸다.

명나라 친왕비가 되어 있는 당질녀 성씨, 즉 성삼문의 막내고모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세종대왕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12월 9일에는 좌승지 김종서(1383~1453)를 함길도 도관찰사
로 내려 보내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있는 성달생과 함께 여진족을 본격적
으로 정벌하여 북방의 영토를 확장하게 한다.

그러나 북방 영토확장에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그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함길도 도관찰사를 자원해 오다시피 한 김종서는 2년 가까이 함경도를
다스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는 자신이 직접 군사권을 장악하여 여진
정벌의 일선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세종께 품신하여 세종 17년(1435) 3월 8일에 7세 연장의 성달생을
숭정대부(종1품) 중추원사로 승진시켜 중앙으로 올려 보내고 3월 27일에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자리로 옮겨 앉는다.

함길도 관찰사 자리는 정창손의 부친인 정흠지(1378~1439)에게 맡겼다.

성달생이 승진하여 서울로 발령받던 날 그의 사촌아우 성억은 공조판서에
제수된다.

그런데 이 해 4월 17일에 을묘년 식년시가 치러지니 성삼문은 18세의
나이로 소과에 응시하여 생원시 3등 56인 중의 하나로 합격한다.

벌써 학문이 숙성해 있었지만 명문집안답게 자손의 소년등과를 달가워하지
않아서 아직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데, 명년인 세종 18년(1436)
병진년은 조부 성달생의 회갑해이므로 아마 집안에서 장손의 소과 응시만은
허락하였던 모양이다.

소년등과하면 교만해져서 대성하기 어렵게 되므로 뼈대있는 명문가에서는
이를 극력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부의 회갑년이 되니 장손으로서 등과하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
될 터이라, 생원시에 응시하는 것만을 묵인했을 듯하다.

그래서 그 다음 식년시인 세종 10년(1438) 무오에 21세로 문과급제하면서
문과방목에 생원 성삼문이라 기록하게 된다(그 생원시에 제출한 시권이
"성근보선생집"이 편찬되던 영조연간까지 성삼문의 외손 박호의 방손가에
보존되어 있었다 한다).

이 과거에서 하위지가 장원급제하였었고 하위지의 아우 하기지도 동방이
되어 함께 급제하였으며 신숙주는 소과인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있다.

우암 송시열(1607~89)이 현종 9년(1668)에 지은 "홍주성선생유허비"에
의하면 성삼문이 문과에 급제하고 나서 태어나 자란 외가에 인사하러 왔을
때 잔치를 베풀면서 삼현육각의 연주용 악기들을 걸어 놓았었다는 오동나무
가 그때까지 살아 있어 그 가지를 고로들이 지적하고 있었다 한다.

이때 성승은 정3품 대호군에 올라 있어 4월 28일에 경원절제사 이징옥이
모친상을 당하여 이임할 때 그 후임의 물망에 오르기도 한다.

성달생은 세종 19년(1437) 12월 1일에 지중추원사를 맡게 되었으니 부자가
모두 군권을 장악하는 요직에 있게 되었던 모양이다.

성삼문이 문과에 급제하자 안평대군을 통해 그 학문과 인품을 전해 들은
세종은 집현전에서 키워낼만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그를 집현전에 배속시켜
그 또래의 수재들인 박팽년(1417~56) 신숙주(1417~75) 하위지(1415~56) 이개
(1417~56) 이석형(1415~77)등과 함께 학문 연구에 골몰하게 한다.

그래서 이들을 삼각산 진관사로 보내어 사가독서를 시키니 세종 24년(1442)
임술년에 이들은 공부하던 여가에 삼각산을 시제로 하여 서로 시를 주고
받는 연구형태의 창수시를 짓는데 성삼문의 문집인 "성근보선생집" 권1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진관사 승려인 일암이 항상따라다니며 이를 베껴 놓았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진 내용이다.

그런데 성삼문은 이때 조모상을 당하고 있었던 듯하다.

세종 22년(1440) 7월 22일에 그 부친인 성승이 경상도 병마절제사로 임명
되고 12월 4일에 조부 성달생이 판중추원사에 제수되니 아직 집안에 상사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 세종 24년 2월 30일에 성승을 기복시켜 평안도 창성진
첨절제사를 삼는다는 전지를 내리고 있으니 세종 22년 12월과 24년 2월
사이의 어느때에 그 조모가 돌아갔을 것이 분명하다.

이에 성승은 3월 2일 다음과 같은 사직소를 올린다.

"신은 이미 적을 막는 재주도 없었고 그 일에 관계한 몸도 아니었는데,
이제 기복의 명을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남방
에서 수자리를 지키다가 자모와 영결하지 못해서 애통한 마음 끝이 없는데
지금 또 기복하여 상제를 마치지 못하면 생전과 사후에 모두 어미에게
효성스러움이 없는 것이니 부끄러운 낯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의 자비가 신을 기복시키는 명령을 돌이키어 상제를 마치게
하십시오"

그러나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승은 창성진에 부임하기는 하였으나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 하여
무예를 익히고 육식하는 일을 거부하며 지내게 되니 7월 6일에 세종은
평안도 관찰사 정분(?~1454)에게 전지를 내려 이를 못하게 하라고 명한다.

장자인 성삼문이 집현전 학사가 되어 성리학적인 의례 기준을 마련하고
있는 마당이니 아무리 성승이 무반으로 발신하였다 하나 그 의례를 철저하게
지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해에 성삼문이 사가독서장인 진관사에서 동료들과 창수시를 남겼다면
이미 장손의 상기는 끝난 상황이라고 보이니 성삼문의 조모 풍양 조씨 운개
의 따님은 세종 23년(1441)에 돌아갔으리라 생각된다.

조씨부인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명승이던 환암 혼수(1320~92)의 맏형인 조건
의 세 아들 석간 조운흘(1332~1404), 조운개, 조운식 3형제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혈손이었다.

그래서 풍양조씨 3형제의 공동 상속인으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아 성씨
집안에 보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달생은 66세에 부인 풍양조씨를 잃고 나서 67세 되던 해인 세종
24년(1442)에 장자 성승마저 창성도호부사로 내려가게 되자 장손인 성삼문과
함께 지내게 되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69세 나던 해인 세종 26년(1444) 갑자 2월 28일 세종대왕과
왕비 청송심씨가 청주 초수리로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자
판중추원사의 자격으로 어가를 수행하여 이에 호종해 간다.

당시 48세이던 세종이 태종의 총애를 받던 원로대신으로 오랫동안 외직에
많이 나가 있다가 10여년전부터 내직에만 있어 온 성달생에게 바람을 쐬게
하려고 일부러 호종시킨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69세의 나이에 3백여리 청주 여행길이 무리였던지 4월 10일 초수리
형재소에서 성달생은 병없이 급서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정사를 철폐할 정도로 몹시 애도하며, 장례를
성대히 치러서 자손에게 유감이 없도록 하라고 명한다.

세종이 반함(시신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 여부를 확인하고 창졸간에
잊었다고 하자 내탕보배를 내려주어 반함하게 하였다든지, 사후에 곧바로
시호를 양혜라고 내려주었다는 사실 등은 그 예우의 정도를 알만하게 한다.

세종대왕이 온천행행에 항상 성삼문 박팽년 이개 신숙주 최항 등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을 편복으로 수행시켜 전도하게 하면서 고문에 응하게 하였었다
하니, 이때도 성삼문이 편복 수행하여 조부 성달생의 시중도 아울러 들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세종은 더욱 성달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장례를 성대히 치러
주도록 면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아서는 아우 성녕대군의 처당숙이라 손윗사돈에 해당하고
그 자손인 성승과 성삼문이 무반과 문반에서 믿을 만한 신하로 신망이
두터운데 자신이 극노인을 외지로 끌어내어 객사시킨 듯한 죄책감도 있어서
더욱 세종은 그 장례를 극진하게 치르게 하였던 듯하다.

성달생의 묘소는 파주 동면 금동에 있다고 한다.

"세종실록" 권104 세종 26년 갑자 4월 무자조에서는 성달생이 폭졸한
내용을 싣고 그의 행장을 약술하고 있는데 풍채가 아름답고 편지글씨(서찬)
를 잘 썼다고 밝히고 있다.

미모에 글씨 잘 쓰는 것은 창녕성씨 집안의 혈통이었던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