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이 태어난 홍주 노은동은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해당한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천안에서 장항으로 이어지는 21번 국도를 타고 예산에서
홍성으로 가는 도중에 예산 군계를 벗어나 홍성군으로 진입하여 인후원이란
곳을 찾으면 된다.

이 인후원 고개에서 홍성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다가 방향의 오른쪽으로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대인리 다음에 노은리가 나오는데 백제 멸망 당시
최후의 항전이 있었던 임존성이 있는 봉수산 산자락이 벋어 내려 매봉(응봉)
과 닭제산(계봉)을 차례로 나즈막하게 일으켜 놓은 그 산밑에 자리잡고 있다.

1923년 홍선군수 이민녕이 편찬한 "홍성군지"에 의하면 그때까지 성삼문이
탄생했던 집인 성삼문의 외가 죽산 박씨 댁이 그 외손의 후예인 김경지에게
전해져서 지켜지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 노은동에 가서 그 집터를 확인하려 하니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다만 노은동 제일 높은 터에 기와집 한 채가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그
집이 박씨댁 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성삼문이나 최영 같은 인재가 태어나려면 그런 터라야 할 듯 하니 말이다.

그 집에서는 용봉산이 맞바라다 보이는데 용봉산 자체가 마치 금강산이나
설악산 월출산처럼 험준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골봉암산으로 강인한
기질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완만한 토산 연봉으로 일관되는 태안반도의 산세에서 어떻게
이런 험준한 산이 돌출될수 있었던지, 참으로 자연의 조화는 오묘하기 짝이
없다.

최영장군이나 성삼문 같은 충의열사를 배출하기 위해 자연은 이런 산을
이곳에 있게 하였던 모양이다.

어떻든 성삼문이 외가인 노은동 죽산 박씨 댁에서 탄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고 세번이나 소리쳐 묻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삼문이라 하였다 하는데 이때 아마 부친 성승의 나이는
18세전후로 아직 무과급제 전이었을 듯하다.

그래서 상승 부부는 노은동 처가에 기거하면서 자유롭게 과거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 성삼문의 조부인 성달생(136~1444)은 43세의 장년으로 전라도 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로 전주에 가 있다가 11월20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겸
판길주사가 되어 함길도 길주로 임지를 옮기려다 11월23일 심온옥에 연루
되어 11월26일에는 삼척에 유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이 이렇게 어수선하니 장손의 출산을 위해 시골 친정으로 보낸 큰
며느리와 장손의 귀가는 무한 보류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심온옥이 단시일에 종결되고 성달생의 혐의도 풀리게 되어 다음해인
세종 원년91419) 3월5일에 성달생이 중군총제로 복직되어 중앙의 병권을
장악하므로써 집안의 근심이 사라짐에 있어서랴!

성삼문은 서울 본가로 나들이를 할 만큼 클때까지 노은동 외가에서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달생은 노은동에서 얼마 멀지 않은 비인에 왜구가 침략하였다는
급보에 접하자 5월3일에 중앙군을 이끌고 신속하게 비인으로 내려가서 왜선
50여척을 불지르는 대공을 세우는데 아마 손자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이렇게
질풍같이 달려가 왜구를 섬멸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성달생이 비인에서 왜구를 격파하자 세종은 즉시 성달생에게 경기
황해 충청 수군도처치사를 제수하여 경기 황해 충청 3도 수군을 총괄하도록
한다.

그리고 왜구의 뿌리를 뽑아 이를 근원적으로 소탕하기 위해 5월14일에
대마도 정벌을 결의하고 5월21일에 삼군도통사 최윤덕(1376~1445)을 거제도
임지로 보내는데 5월23일에 성달생은 백령도 근해에서 왜선을 격파하여
왜구를 수장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대마도 정벌의 성공을 예시하는 듯한 상서로운 조짐이라서 태종과 세종은
그 소식을 듣고 성달생의 공로를 크게 치하한다.

드디어 6월19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1360~1425)가 전함 227척과 군사
1만7천2백5인을 거느리고 거제현 주원도 방포를 떠나 6월20일 대마도로
진격해 들어가서 대소적선 1백29척을 빼앗고 1천9백39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1백14인을 참수하며 21명의 포로를 사로잡고 포로가 된 중국인 남녀 31명을
되찾아 오는 전과를 올린다.

이때 성달생은 경기 황해 충청 수군처치사로 후방에서 대마도 정벌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지원이 신속하지 못했다 하여 6월21일에
의금부에 하옥되는 불행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대마도 정벌의 성공으로 기분이 좋아진 태종과 세종은 동정군을
포상한 다음 성달생을 바로 사면하여 9월25일에는 중군총제로 다시 기용한다.

지난해 태종 18년(1418) 2월4일에 천연두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태종의
막내왕자 성녕대군 종(1405~1418)은 성달생의 사촌아우 성억(1386~1448)의
맏사위인데 불과 14세에 요절하니 성씨를 불쌍히 여긴 태종이 세종에게
성씨 집안을 공신가문의 예에 준하여 특별히 우대하도록 명령하였기 때문
이었다.

이에 10월24일에는 성억을 경창부윤으로 삼고 성억의 친형인 성엄은 강원도
관찰사를 삼는다.

성녕대군은 태종이 가장 사랑하던 아드님으로 그 사랑이 유별날 정도라서
대군 부인도 절세 미인의 명문 규수를 택하노라 미모의 혈통을 타고난
창녕성씨 가문에서 간택해 들였었는데 불과 14세에 허망하게 돌아가니
태종은 이 막내왕자를 잃고 거의 실성할 정도로 애통해 한다.

그래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형제들을 살육하면서 왕권을 장악했던 자신의
일생을 반성하며 불교를 박해했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성녕대군의 집을
절로 만들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례가 되어 도성 안에 절이 늘어날 것을 경계하는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자 성녕대군의 무덤이 있는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
대자암이라는 원찰을 크게 짓고 왕실 불사를 전담하게 한다.

그리고 성녕대군의 묘소 아래에 신도비를 세워 대군의 사적을 길이
남기는데 글은 당대 석학인 변계량(1369~1430)이 짓게 하고 글씨는 대군의
처당숙인 명필 성개(1380~1440)에게 쓰게 하니 성개는 성달생의 바로 아래
친아우였다.

태종은 막내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여 이 해 6월 3일에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제3왕자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뒤 8월 8일
에는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통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만다.

그런데 이 해에 안평대군과 성삼문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태종이 성녕대군을 잃고 애통해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이 해 탄생한 안평대군을 성녕대군에게 양자로 보낸다.

그러니 안평대군은 성삼문의 재당고모인 성억의 따님 성씨의 양자가 되어
둘 사이가 내외종 8촌 형제가 되고 말았다.

안평대군과 성삼문의 만남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세종 초년 성삼문이 유아기에 있었을 때부터 왕실과
창녕성씨 일문은 인척으로 밀착되어 부귀영화를 함께 누려가게 된다.

이에 성삼문이 세살되던 세종 2년(1420) 4월 15일에는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이 45세의 장년으로 사은사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는데
아마 이 어름에 성삼문의 부친 성승(1400께~56)이 20대 초반으로 무과에
급제하였을 듯하다.

성삼문이 8세되던 해인 세종 7년(1425) 4월 11일에는 성달생이 다시
명나라 사신을 전송해 보내는 반송사가 되어 우리나라 출신으로 명나라
황실의 내관(환관)이 되어 자주 본국에 사신으로 나오는 윤봉을 신의주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성달생의 용모가 윤봉의 눈에 띄게 됨으로써 성삼문의
집안에 뜻밖의 재앙이 닥치게 되었다.

성삼문이 10세되던 해인 세종 9년(1427) 정미 1월 25일에 성달생이
공조판서로 임명되어 온 집안이 경사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4월 21일
윤봉이 다시 사신으로 나와 명나라 황실의 여러 친왕비빈으로 간택할
미녀를 구하면서 윤봉이 성달생의 막내 따님을 지목하여 간택 대상으로
삼고 4월 25일에 세종과 함께 편전에서 미인들을 모아 놓고 간택하는
자리에서 성씨를 제1등으로 뽑아 다른 6인의 처녀와 함께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역시 미모의 혈통을 타고 났기 때문에 당하는 횡액이었는데 마침 이때
도총제를 겸하여 평안도 도절제사로 평안도에 내려가 있던 성달생은 이
뜻밖의 사태를 맞아 5월 4일에 왕명으로 소환된다.

그리고 성씨 일행 미녀 7인을 명나라까지 호송하는 호송사의 책임을 맡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게 된다.

결국 막내따님을 명나라 황실에 강제로 시집보내면서 그 위요(혼인때
가족중에서 신랑 신부를 데리고 가는 사람, 상객 요객 후배 후행으로
부르기도 한다)로 따라가게 된 셈이었다.

함께 뽑힌 처녀는 목사 차지남, 판관 정효충, 부사직 노종덕, 부사정
안복지, 목감직 오척, 서승 최미의 따님들이었는데 이들 7인의 명문가
출신 미녀들은 음식 시중을 들어줄 집찬비 10인과 시중을 들어줄 종비 16인
과 함께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7월 20일에 서울을 떠나기로 하자 7월 18일에는 세종왕비 청송 심씨가
이들을 모두 경회루로 불러 전별연을 베풀어 준다.

이때 처녀의 모친을 비롯한 친족들도 외명부의 자격으로 시연하게 되는데
밤이 되자 초가을 열여드레 둥근 달이 휘영청 밝고 밤기운 소슬하여 풀벌레
소리 구슬프니 누하의 시종비들로부터 터지기 시작한 울음소리가 궐밖까지
들릴 만큼 구슬프게 번졌다 한다.

성씨의 사주단자에 의하면 신묘(1411) 8월 17일 신시 생이라 하였으니 이때
성씨의 나이는 17세로 장조카 성삼문보다 겨우 7세가 더 많았다.

이에 성삼문은 10세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7세 연장으로 함께 자라나며
온갖 잔정이 다든 막내 고모를 생이별하는 뼈아픈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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