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건이 사람을 만든다.

엄길청(42) 아태경제연구소장의 이력서를 보면 이말이 실감난다.

그는 증시분석가로 출발해 사소한 경제흐름을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풀어주는 경제평론가로 맹활약하고 있다.

라디오방송에서 매일 아침 ''손에 잡히는 경제''를 진행하고 있고 YTN에선
''집중조명''이란 시사토론에도 출연하고 있다.

세종대와 한양대에 고정 출강하는 것은 물론 여러 대학에 특강을 나가고
증권연수원의 강의도 맡고 있다.

''손에 잡히는 경제'' ''재미로 보는 개미투자'' ''성공재테크'' 등의 저서도
펴냈다.

특히 지난 84년 국제그룹 해체당시엔 그룹핵심부에 근무해 지금의 기업
자금위기를 바라보는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수원 경기대 특강을 마치고 돌아온 지난 21일 저녁 그를 만나 여건이
사람을 만들게 된 변신과정을 추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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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 사람 = 손희식 < 증권부 기자 > ]

-4년전 제일증권 투자분석부장을 그만두고 홀로서기에 나섰을 때와는 사뭇
다른 일로 바쁜 것 같은데요.

"아태경제연구소를 차리며 프리랜서로 독립할 당시엔 2가지를 하고자
했습니다. 투자전략과 경영전략분야의 컨설팅업무에 전념하겠다는 것이었죠.

막상 시작하고 보니까 개인적인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연구소를 키우는 일에 앞서 대중을 위한 경제전문가가 필요하구나 하는
점이 절실히 와 닿았습니다.

대중의 입장에서 경제현상을 풀어주고 도와주는 틈새시장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경제정보 중개사"랄까 "정보해설자"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다소 생소한 직종으로 들리는데요.

"라디오방송을 통해 "손에 잡히는 경제"를 진행하다 체험하게 된 사실
입니다.

대중에게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를 내주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경제정책이나 제도변화를 대중의 시각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죠.

갈수록 정부의 힘이 약해지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일반대중이나 사회가 상품가치보다 정보등의 소프트한 분야에 대한 가치를
중시하게 됐다는 점도 대중전문가를 필요하게 만든 큰 배경이라고 봅니다.

경영학이나 경제학의 이론은 하나의 체계를 갖춰 1차 정보를 주지만 이를
가공해 일반대중에 다가가는 2차 정보를 다루는 역할도 중요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연구소를 대형화하는 것보다 휴먼비즈니스에 치중하게 됐습니다.

한마디로 "움직이는 사무실(Mobile Office)"에서 근무하는 것이죠"

-그동안 화려한 변신의 연속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사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해 종합상사(국제상사)를 들어간 것부터가 좀
색달랐죠.

그러다 다시 자본시장을 분석하는 경제연구소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맥이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수출입국을 부르짖던 당시의 종합상사맨은 상당히 애국자라는 자긍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증권만 하더라도 개인이익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분야이기도 하지만 산업
자본을 창출해 내는 곳이고 잘만 되면 자산재분배시장이 될 수도 있죠.

사회적인 이익이나 대중이익을 추구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었다고 봅니다.

현재 대중을 향한 정보중개라는 일도 그런 연장선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80년대 중반 국제그룹이 해체될 당시 그룹비서실 대리로 근무했던 것으로
압니다.

현재 중견그룹들이 겪고 있는 재무위기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텐데.

"당시 느꼈던 경험이나 상황으로 보아 지금의 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중견그룹들마저 휘말려든 이같은 유동성위기는 단순히 경기순환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엔화가 강세로 돌아섰다거나 재고정리가 순조롭다고 해서 근본적인 어려움
이 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경영주들이 그야말로 뼈를 깎는 아픔으로 경영구조를 개선하고 자산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할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우선 엄청난 차입금이 문제죠.

경제성장률이 5%에 그치고 금리가 연 12%에 달하는 마당에 3백%에 이르는
부채비율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이 고정자산을 사들이느라 차입금이 늘어났는데 부채비율을 대폭
낮춰야 합니다.

21세기는 소프트경제이기 때문에 넓은 공장도 필요없고 모든 공장이 한국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은행들도 담보대출 관행을 바꿔야 하고요.

시장경제에 몸담은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기업경영위기는 정부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입니다"

-전공분야와는 다른 증권분석가로 돌아선 어떤 계기라도 있었는지.

"몸 담고 있던 그룹이 해체되면서 당시 같은 계열사였던 동서증권의
조사부로 옮겼습니다.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구요.

그러던 차에 한국투자전용펀드인 코리아펀드(KF)가 설립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죠.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리서치업무가 중요해졌습니다.

기업분석자료와 투자분석보고서를 만드는 일입니다.

지적인 호기심도 발동하고 해서 리서치업무에 전념하게 된 것이죠.

동서경제연구소 창설멤버였다는 점 때문에 한화그룹으로 자리를 옮겨
제일경제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야간에 석사과정을 다닌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낮에 다녀야 하는
박사과정까지 용인해 준데 대해선 지금도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숱한 강연과 강의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학생신분을 벗지 않았습니다.

"공부의 연속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의 거울이라고 불리는 증권을 다루다보니 여러가지로 쌓아야 할 지식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프랑스의 정책대학원인 HEP대학원에 보낼 논문을 준비중입니다.

제3세계에 대한 한국금융의 진출전략을 모색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또 요즘에는 정치가 경제를 움직인다는 측면에서 정치학이나 복지경제분야
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지식의 변화나 혁신을 놓칠까봐 학문적인 긴장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학생이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공부에다 강의하랴 방송출연하랴 시간이 모자랄텐데 주식시황을 들여다볼
틈은 있으신지.

"요즘도 하루에 1백분정도는 시황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PC통신을 통해 시황진단이나 전망을 매일 입력하고 있죠.

지난 85년부터 89년까지 매일 시황을 기록하고 시황분석 일일정보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기간의 웬만한 시황흐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황을 직접 쓰는 시절이 지나고선 신문의 컬럼과 방송사의 일일 시황방송
을 시작하게 됐죠.

시황방송도 프리랜서로 나오기전까지 5년간 계속했습니다.

어찌보면 저의 생활은 시황기록자이자 시장기록자였다고 하겠습니다"

-앞으로 주가전망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시장의 초점은 저점을 통과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주가는 경기보다 6개월정도 선행한다는 측면에선 경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죠.

전문가들마다 경기가 올 하반기나 늦으면 내년 1분기에 저점을 확인할
것으로 전망한다는 점에 비춰 보면 올 2분기 주가를 바닥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가저점이 확인된 시장은 구조개편을 가져온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중소형 개별재료주시대는 가고 우량대형주들이 시장의 중심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죠.

또 내수관련주 강세와 수출관련주 열세였던 분위기도 역전될 것입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