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성씨가 창녕을 떠나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은 매죽헌 성삼문
(1418~56)의 고조부인 이헌 성여완 (1309~97)때부터이다.

숙종 35년 (1709) 성환이 편찬해 낸 "창녕성씨족보"에 의하면 성여완의
고조부인 성인보가 창녕 성씨의 시조로 되어 있다.

족보에 실린 성인보 행장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성인보는 창녕 호장으로 조정사가 되어 어느 때 송경, 즉개성에 올라
왔다가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만다.

그의 독자인 송국이 이 소식을 듣고 천리를 달려 올라와서 부친의
시신을 몸소 짊어지고 고향으로 내려오는데 창녕을 거의 다 와서 날이
저물자 청산원 문밖을 빌려 자게 되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와서 하얗게 쌓여있고 시신 아래로부터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서 앞산으로 이어져나가 있다.

괴이하게 생각하여 그 발자국을 쫓아가 보니 지포뒤의 북산 산꼭대기에
이르러서 그쳤는데 그친 곳만 자리 한잎 정도의 넓이로 눈이 녹아 있다.

이에 송국은 바로 이곳에 부친의 시신을 장사지내게 되고 미구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그 묘소가 있는 곳은 창녕현 서쪽 십리쯤에 있는 맥산이라 하며
성송국이 이런 명당을 호랑이로부터 점지받게 된 것은 부친의 시신을
천리밖에서 몸소 지고 내려온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하시중까지 지낸 성송국이지만 역시 고향을 떠나지 못하여
그가 서거하였을 때도 그의 시신은 고향집에 안치되어 있었고 그의 상중에
그의 집을 찾아온 산승을 그 자제들이 극진히 대접한 덕으로 그의 묘소는
창녕현 서쪽 20리밖에 있는 대곡 우항산에 자리잡게 된다.

이때 이 자리를 잡아준 산승은 그 자제들에게 후세 자손들이 대대로
큰 벼슬에 오르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뒤에 풍수가들은 이를 보고 와우형 명당에 화초안이 갖춰지고 좌우수가
청룡 백호를 휘감아 명당앞에서 합수되어 20여굽이를 굽이치며 화초형의
안산을 휘감아 나가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니 반룡수파형을 아울러 갖췄다고
하며 영남지방에 있는 3대 명당중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던지 송국의 증손자인 성여완은 충숙왕 5년 (1336) 병자에
26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종2품 첨서밀직정당문학에 이르러 대신
반열에 오르게 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는 그 자제들이 개국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고향으로 유배되는 상황인데도 84세의 기로 대신이라 하여
검교문하시중을 제수하며 정승대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여완의 아들들인 성석린 (1338~1423) 성석용 (1352~1403)
성석인 (?~1414) 삼형제는 조선 태조와의 친분관계 때문에 결국
태종때부터는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는데 특히 독곡 성석린은 태조의
옛친구로 태종의 부탁을 받고 왕자난이후 함흥으로 물러나 있는 태조의
마음을 돌려 서울로 되돌아오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움으로써 결국
영의정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둘째 자제 회곡 성석용은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정2품 자헌대부
개성유후를 지내고, 셋째 자제 상곡 성석인은 예조판서에 이르는데 이들
삼형제가 한결같이 글씨를 잘 쓰고 용모가 출중하며 성격이 원만하여
주변의 부러움을 독차지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면모가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니
우선 성석린은 태종의 세객이 되어 태조를 설득하러 가면서 태종에게
벼슬하지 않는 포의를 가장하고 가서는 자신이 만약 태조를 속였다면
자신의 자손들이 천벌을 받아 반드시 눈이 멀거라는 거짓다짐을 둔다.

그래서 결국 태조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장자로부터 눈이
멀기 시작하여 이후 3대가 모두 복중 맹인으로 태어났었다고 "소대기년"
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리고 성석인의 경우 태종 8년 (1408) 4월16일 명나라 사신 황엄이 와서
미녀를 구하자 태종은 금혼령을 내리고 명나라에 보낼 미녀를 간택하게
되는데 당시 예문관 대제학으로 있던 그가 그 따님을 명나라로 보내지
않기 위해 금혼령을 어기고 출가시키고 마는데 그 벌로 일시 순금사에
갇히고 벼슬을 내놓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모두 미모의 혈통을 타고난 덕에 겪는 수난이었다.

이런 미남3형제 대신중 가운데인 회곡 성석용이 매죽헌 성삼문의
증조부이다.

성석용은 당시 명문세가인 광산 김씨 성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다시
아들 3형제를 두는데 장자가 달생 (1376~1444), 차자가 개, 3자가 허였다.

장인인 김성리는 사온승을 지냈지만 그 부친 김진은 정당문학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재상의 배출이 끊이지 않는 집안의 후예였다.

성석용의 장자 성달생이 바로 성삼문의 조부이다.

성달생은 고려 공양왕 원년 (1390)에 15세로 생원시에 합격한 수재였는데
인물이 빼어나게 잘 생기고 담력이 있으며 기운이 장사라서 오히려 무과에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태종이 잠저에서 한번 보고 몹시 사랑하여 항상 호남아라고
부르며 대우를 남다르게 하니 벌써 동궁 시절에 정종에게 아뢰어 정4품
호군으로 승차시키고 자신이 등극하여서는 2년 (1402) 임오에 무과를 처음
신설하며 이에 응시하게 하여 1등으로 뽑아 즉시 종3품 대호군을 제수하고
뒤이어 흥덕진 병마사로 내보내며 8년 (1408) 무자에 왜구를 격퇴하자
말 한 필을 하사하고 사연을 내려 위로하기까지 한다.

태종 10년 (1410)에 성달생이 다시 무과 중시에 2등으로 뽑히자 태종은
즉시 빈객을 접대하고 종친과 재상을 공궤하는 등 일체 조정의 접대와
연회를 총괄하는 예빈시의 수장인 판예빈시사 (정 3품 당하관)에 임명한다.

그리고 태종 13년 (1413) 계사에는 경상도 성주 목사로 내려보냈다가
임기도 차기 전에 함길도 경성 절제사로 옮겨서 야인을 다스리게 하는데
야인들이 매일같이 와서 성달생과 함께 활을 쏘면서 쏘기만 하면 과녁을
맞히는 그의 활솜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한다.

드디어 태종 16년 (1416) 병신에는 중앙으로 불러 올려 종2품
중군동지총제를 시키고 다음 해인 태종 17년 (1417) 정유 12월 3일에는
전라도 도관찰사겸 병마도절제사를 제수하여 전라일도를 내맡긴다.

그리고 다음해인 태종 18년 (1418) 무술 8월8일 세종대왕이 즉위하고
나서는 11월 20일에 함길도절제사겸 판길주 목사로 옮겨가게 하여 다시
야인을 방어하게 한다.

그러나 성달생은 함경도로 부임해 가지 못한다.

바로 11월23일 왕비 청송심씨의 친정아버지인 영의정 심온 (1375~1418)이
군사권은 마땅히 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사실이 상왕인
태종에게 알려져서 태종이 이를 대역죄로 다스리게 되는데 성달생도
이 옥사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심온은 이때 명나라에 가 있어서 이런 옥사가 진행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세종의 즉위를 인정하여 책봉사를 보내준 명나라에 감사하는 사은사의
정사로 9월8일에 명으로 떠나서 사신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심온이 국왕 부자를 이간하여 권력을 다투게 하려 했다고 하면서
그를 대역죄인으로 몰아갔으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는 다분히 태종이 의도적으로 꾸며낸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외척의 간정이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인 것을 역사를 통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태종은 세종으로 하여금 마음껏 이상정치를
펼쳐내게 하기 위해 세종의 외가이며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집안을
이미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계기로 역적으로 몰아 처단하고 나서 이제는
세종의 처가까지 역적으로 만들어 간정의 길을 차단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심온 집안은 이 옥사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심온의 형인 동지총제
심정은 11월 26일에 참수되고 심온도 12월 22일 국경을 넘어 의주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채 잡혀와서 변명할 새도 없이 수원으로
압송되어 자진을 강요받고 역적으로 죽어간다.

이런 와중에 성달생은 이 옥사에 연루되어 11월 26일 삼척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이 옥사가 워낙 태종이 만들어낸 무옥이었으므로 심온 집안이
역가가 되어 간정의 길이 막히자 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은 미구에 모두
사면되어 풀려나니 성달생도 다음해인 세종 원년 (1419) 3월5일에는
중군총제로 다시 복직된다.

그런데 이렇게 왕실과 성씨 집안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던
해인 세종 즉위년 (1418) 무술에 왕실에서는 세종의 제3왕자인 안평대군
용 (1418~53)이 9월19일 창덕궁에서 탄생하고 성씨 집안에서는 장자인
매죽헌 성삼문이 충청도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난다.

성삼문의 외조부는 당시 명문세가이던 죽산 박씨 집안의 호조정랑
박담이었다.

그런데 박담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고려왕조와 운명을 같이한 최영
(1316~88) 장군이 나고 자란 마을인 노은동의 그 터전을 모두 차지해 살고
있었다.

그는 서산 정씨 수문전학사 정상의 따님과의 사이에 3남5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 성삼문의 모친이 장녀로 맨 맏이였고 그 아래로 아들
3형제가 있었으며 그 다음에 딸 4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넷째 따님에 해당하는 이가 기계 유씨 유해에게 출가하여 조선
후기를 주름잡는 명문 기계 유씨의 기틀을 잡아 놓는다.

그래서 그의 9세손인 영의정 지수재 유척기 (1691~1767)는 노은동에
있는 유해의 묘소에 묘지를 지어 넣으면서 그 9대 조부인 유해의
맏동서이던 성승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

성승의 묘소와 성삼문의 부인 묘소 및 유해의 묘소가 모두 그 장인인
박담의 묘소 왼쪽 산기슭에 있기 때문이었다.

유해는 처가에 의탁해 살다가 겨우 24세에 유복자 하나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떴으므로 그대로 처가 묘산에 장사지내게 되었고 성승은
능지처참되어 그 시신의 일부가 이곳에 묻히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