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세게 재수 없던 사나이".

서울 면목동 서일전문대 앞에서 일식 우동체인점인 새미락을 운영하는
이영재(54)씨.

그는 작년까지만 해도 자신을 "정말 되는 일 하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올해초까지만 해도 오락실로 운영되던 곳을 우동집으로 단장해 새 출발을
시작한 그의 창업일기를 들여다보면 그럴만 하다는 생각도 든다.

총괄이사로 있던 모 전기요 제작업체가 지난 95년초 도산을 하면서
이씨의 운명은 바뀌기 시작한다.

딱지어음 사기에 걸리면서 휴지조각이 된 어음만을 남겨 놓은채 회사가
쓰러진 것이다.

그 회사의 등기임원이었던 관계로 회사채무에 대한 보증까지 섰던 이씨는
회사 부도로 수천만원의 손해를 봐야 했다.

경리부장으로 시작해 15년간 몸바친 직장을 잃는것도 가슴 아팠지만
딱히 저축해둔 돈도 없는 상태라 막막했다.

그러나 이씨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가 주어졌다.

그해 5월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 사장으로 있는 전기요 부품업체에
입사할수 있었다.

새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때쯤인 작년 1월께 마산과 부산지역
출장길에 오른 그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한다.

5개월간 병원침실에 누워야 하는 큰 사고였다.

"''양쪽 팔이 부서졌다''고 의사가 얘기했을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그는 술회했다.

광진구청에서 장애인수첩까지 발급해 줄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대책없이 누워있기도 답답했다.

대학을 졸업하긴 했지만 아직 직장이 없는 큰아들과 대학2년생인
작은아이의 얼굴이 눈에 어렸다.

평생 자신만을 의지해온 부인의 거친 손도 눈앞을 가렸다.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언제까지 불행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퇴원과 함께 퇴직해야돼 근무기간이 1년이 안되는 관계로 퇴직금도
못받을 판이었다.

무일푼이었다.

병상에 누워 매일 벼룩신문을 뒤적였다.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신문에 나오는 창업성공기와 광고를 스크랩 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현재 중곡동에 사는 집을 담보로 잡고 6천만원까지 수시로 빌릴 수 있는
시중은행의 마이너스 대출통장에 가입했다.

퇴원한 뒤로는 적당한 사업물색을 위해 직접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철저한 준비와 의욕을 가진다면 일이 풀리리라는 믿음에서였다.

호프집 통닭집 여관등 안가본데가 없었다.

하지만 권리금으로 최소 1억5천만원을 달라는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모 탕수육체인점을 찾아갔다가 만난 상담직원이 지금의
일식우동체인점을 소개해줬다.

그 직원이 일식우동체인점으로 옮기면서 고객인 이씨도 함께 끌어들인
것이다.

이씨는 우선 우동체인점이 큰 돈이 들지 않는다는게 마음이 들었다.

큰돈은 못벌어도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된다는것에도 매력을 느꼈다.

창업붐을 타고 성행하는 체인점 사기를 막기위해 보증보험격으로
3년만기 적금을 들어주는것도 안심이 됐다.

길목이 좋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서일전문대라는 학교와 주택가를 끼고 있어 손님이 꽤 있을 것 같았다.

요리법도 걱정할게 없었다.

본사에서 2주간격으로 주방장을 파견, 상세히 알려주기 때문에 초보자라도
쉽게 운영할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양팔을 수술해 무거운 것은 들지 못하지만 음식배달 정도는 할수 있을
것같았다.

부인과 함께 계약하러 가던 날 부인은 한사코 말렸었다.

음식장사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딱히 대안도 없는 상태라 마지못해 따라 나섰던 부인이 상담직원의
얘기를 듣고 먼저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창업자금은 가맹비 2백만원에 임대보증금 2천1백만원, 권리금 2백만원,
인테리어 1천3백만원등 4천9백만원이 들었다.

마이너스대출통장에서 필요한 돈을 빼내 썼다.

이씨는 "개점한지 4개월째로 접어들면서 월4백만~5백만원정도의 수입을
올리고있다"며 "먹고 살만 하다"고 말했다.

단지 학생들이 많은데 다가오는 여름방학이 걱정된다고 했다.

오전 9시에 나와 문을 열고 밤 11시에 문을 닫는다는 이씨는 자리에
눕는 시간이 보통 새벽 1시라고 했다.

이씨는 그러나 "예전에 회사를 다닐때보다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편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젊은이들과 농담도 하면서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환한 얼굴에서 어제의 억세게 재수없는 사나이의 흔적은 없었다.

"명예퇴직하면 퇴직금이라도 많이 받지 않나요.

왜들 그렇게 걱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명예퇴직후 술과 경마 증권투자등으로 퇴직금을 다 잃고 빚까지 지게된
40대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것이 우리시대 명퇴자의 현주소라는것에
대해 그는 안타까워했다.

그의 말속에는 이제 어려움을 과감히 딛고 새로운 출발선에 선 도전자의
의지가 배어있었다.

< 오광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