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많은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꾼 5.16에서부터 5.17과 5.18을 기억
속에 접어두고 또 다른 많은 일들이 새로운 역사의 한 장을 만들어 내는
97년 5월을 되돌아 보고 있다.

그러면서 참으로 무섭기만한 "되새김질 하는 역사"에 전율한다.

죽은 박정희 대통령이 되살아나고 그 시절의 그 인물이 다시 네번째
대권에 도전하는 모습을 본다.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사상 처음으로 영어의 몸이 되는 사나운 광경도
봐야 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참사의 생생한 기억속에서 또다시 아파트 축대가
무너져 사람이 희생되는 부실공사도 되풀이됐다.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역사를 그래서 한탄하고 있다.

아픈 역사가 난국에서 반복되는 현상도 함께 본다.

5월의 많은 일들이 예외없이 나라의 위기에서 배태되고 진행됐다.

최고의 지성들인 대학 총장님들이 더 참지를 못하고 나섰다.

이미 이 나라가 더 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정치는 벌써 대선정국으로 불붙어 비만 오면 불어나는 용들의
얘기로 가득하고 경제는 일본 엔화의 오르고 내림에 일희일비, 경기저점
논쟁만 벌이고 있다.

그 무관심과 "사건"들과 용들의 키재기경쟁 뒤에서 기업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대책없는 일이다.

나라는 벌써 아시아 4룡에서 떨어져 지렁이로 전락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용꿈만 꾸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한결같이 지나온 길의 잘못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다가오는
21세기의 새로운 리더십만을 얘기하고 있다.

참으로 이상하다.

나라의 위기는 국가경영을 책임진 사람이 제대로 된 리더십을 갖지 못한
데서 오게 마련이다.

총체적 난국은 총체적 리더십부재에 다름아니다.

그 리더십의 상실이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용들은 자꾸 새 시대의 리더십을 얘기하고 저마다
최고의 "국가경영자"를 자임한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리더십인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정치가 그 모양인데 경제가 잘 돌아갈리 있겠는가.

문민정부가 출범초기에 내걸었던 화려한 "신경제"는 결국 "복합불황"만을
남기고 침체의 족쇄를 아직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잘 나가던 기업들이 이미 수없이 무너졌고 재벌은 쓰러지지 않는다던
신화도 벌써 옛 이야기가 됐다.

사정없는 명예퇴직의 돌풍속에서 평생직장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무더기로
쏟아진 실업자들이 이곳저곳 방황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언제 실업자문제로 골치썩인 때가 있었는가.

그걸 구조조정이란 말로 덮기에는 상처가 너무 크다.

그래서 지금이야 말로 되돌아 볼 때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위기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지 않은데서 비롯되고
있다.

역사는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한 교훈이다.

그것이 역사가 갖는 힘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앞만보고 달려올줄만 알았지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는
일에 너무 인색하다.

결과는 언제나 잘못된 일의 반복이었다.

잘못될 수 있는 일에 대한 대비책은 없고 언제나 일이 터지고 나서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었다.

그러나 우리만큼 한꺼번에 많은 것을 이룩해낸 활력있는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는가.

우리에겐 되돌아 볼 것이 너무나 많다.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경제기적을 일군 역사가 그렇다.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만한 위기로 주저앉을 민족이 아니라는 걸
우리 스스로가 잘 안다.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면 앞으로 헤쳐나갈 길이 보이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그 활력을 한데 엮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수도 없이 많은 용들에게 바라는 국민들의 순박한 바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