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준

한국의 전통문화와 멀티미디어는 얼핏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문화라고 하면 어쩐지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역사가 5천년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이고 보면 "전통"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과거의 깊이"는 엄청나다.

반면에 "멀티미디어"는 그 어감에서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첨단의 이미지와,
진취적인 분위기 등 그야말로 첨단과학의 집합체 같은 느낌이 드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으 선입견일 뿐,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 둘의 뿌리가 하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은
부분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흔히 멀티미디어의 가장 큰 특징은 쌍방향성,매체의 합성,그리고
디지털화에 있다고 한다.

쌍방향성이란 한마디로 상대방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려는 자세가
쌍방향성의 기본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일방적인 정보전달이 아니라 상호간의 정보교류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멀티미디어의 세계에서는 Internet 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한 TV조차도 시청자인 나의 의사를 물을 만큼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한다.

우리의 전통문화 역시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과의 조화를 소중히
해왔다.

결코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엄교 불교 도교 등 서로
이질적인 문화조차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융화할 만큼 조화의 미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멀티미디어 만큼의 "열린 가슴"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특히, 우리의 토속신앙은 일방적으로 신에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주술을 통해 "신과 대화하는 문화"라는
점에서 우리 문화가 가진 쌍방향성의 토대가 되고 있다.

멀티미디어의 또다른 특성이 "매체의 합성"은 우리 전통음식 가운데
하나인 "비빔밥문화"와 매우 유사하다.

우리의 음식문화는 밥상 위에 여러가지 반찬을 다양하게 차려놓는
것이지만, 이들이 나름대로의 개성이나 특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하나로 합성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비빔밥이다.

말하자면, 어떤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무엇을 만들어내는
"비빔밥문화"는 다양한 모체의 합성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매체를
만들어내는 멀티미디어의 문화적 상승작용과 잘 어울리는 것이다.

이러한 상승작용이 가능한 것은 그 문화에 다양성, 유연성, 그리고
창의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비빔밥문화"야말로 우리 전통문화의 그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 멀티미디어의 특성과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멀티미디어는 디지털화라는 또하나의 특성을 갖고 있다.

디지털이란 모든 정보를 2분법에 의해 0과 1의 숫자로 전환시켜 문자,
그래픽, 영상, 음성 등의 정보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디지털에서는 아무리 복잡한 정보라도 0과 1로 단순화시켜 처리한다.

때문에 디지털화한다는 것은 때로는 단순화한다는 의미가 되곤 한다.

우리의 전통문화 역시 음과 양이라는 2분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삼라만상의 심오한 원리가지도 음과 양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음양의 원리에 따라 정의하면 아무리 복잡한 이치라도 단순화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우리는 단순한 선 하나로도 많은 것을 그려낼 수 있는 이상한(?)
표현기법을 가지고 있다.

서양의 그림처럼 화폭을 가득 메우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선만으로도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선으로 단순화하는 문화적 특성은 그림만이 아니라 의복, 건축 등 우리
전통문화의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이러한 몇가지만으로도 우리의 전통문화는 멀티미디어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적인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우리 선조들이 운송수단으로 사용했던 "보자기"의 문화까지
생각하면 멀티미디어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잘 어울리는 것임을 실감케
된다.

아무 물건이나 쉽게 담을 수 있고,필요에 따라서는 간단하게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는 보자기의 문화는 "Multi"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문화는 가치창출의 토대이다.

때문에 어떤 문화를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경쟁력과도 이어지는 문제가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 전통문화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 강점을 잘
활용한다면 다가오는 멀티미디어시대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앞서가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멀티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고 그 환경을 리드하려면 동서양의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 어느 학자의 일성이 무게감을
가지는 것도 그러한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