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50분.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바삐 어디론가 향하는
연구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짧은 점심시간을 쪼개어 수영도 하고 식사도 마치려면 아무래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수영장에 도착해 준비운동을 마치고 풀장에 뛰어드는 시각은 대략 12시.

또다른 세상에 대한 체험이 시작된다.

물 밑 세상에서는 진공상태의 고요함과 편안함이 있어 바깥세상의 잡음과
번잡함을 떨쳐낼 수 있다.

물 속에서는 자신의 호흡소리와 물방울만이 있을 뿐이다.

"물개모임"이라 이름붙여진 수영동호회는 지난 92년 첫 출발했다.

처음엔 참여회원이 적어 지지부진했지만 재작년부터 점심시간을 활용,
매일같이 인근 수영장을 찾으면서부터 회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회사의 성의어린 지원도 동호회 활성화에 한 몫했다.

필자는 지난 95년말에 수영동호회에 가입했지만 이듬해부터 곧바로
회장직을 맡아 지금에 이르고있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연구소내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점심식사후엔 의례히
사무실 한켠에 앉아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카페에서 동료들과 잡담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물개모임" 회원들에겐 점심시간마저 한가롭지 않다.

비록 사각으로 갇힌 실내수영장이지만 물과의 교감을 위해 발길을
서둘러도 피곤하지 않다.

물 속에서 팔과 다리를 휘젓다보면 어느새 저만큼 속세에서 한 발짝
물러서있는 듯이 느껴져 여유롭기 그지없어서다.

수영을 시작한 이후 부쩍 건강이 좋아진 것도 심신을 가볍게 한다.

요즘 "물개모임"의 화제 인물은 단연 홍일점인 고유선 연구원이다.

필자의 권유로 물개회원이 된 고유선 연구원은 수영을 시작한지 불과
석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당찬 여장부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서툰 수영실력과 타고난 장난기가 어우러져 그녀는 처음 물고기처럼
연신 수영장 물을 마셔댔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른 회원들을 능가하는 수영실력을 뽐내고 있다.

벌써 물개가 된 것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성장하면서 생존을 위해 수영을 배웠다고 목청을 돋우는
"초록빛 수영모" 김영호 선임연구원.

"잠수함" 조충제 선임연구원은 항상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탓에
아주머니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며 자유형의 올바른 자세를 위해 노력중인 구용욱
선임연구원은 오늘도 수영장 가장자리만 맴돈다.

김승현 연구원은 모두가 놀라는 속도파다.

비록 자세는 촌스럽지만 항상 남들보다 저만치 앞서간다.

이밖에도 허성일 연구원과 전영호 선임연구원도 오랜 수영경력을 갖고
있는 실력파다.

하루종일 바쁜 업무에 쫓겨 숨한번 제대로 돌릴 여유가 없는 대부분의
연구원들.

그러나 "물개모임" 회원들은 오늘도 푸른 바다를 힘차게 가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올 여름 휴가철엔 회원들이 함께 바다를 찾아 거친 파도와 싸울
예정이어서 회원들은 벌써부터 가슴 설레여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