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기업들의 주주총회장은 유난히 긴장감이 감돈다.

경영실적이 나빠졌으니 주주들의 기분이 좋을리 없다.

경영진의 책임을 따지는 소리가 나오게 마련이다.

주총을 준비하는 경영진들도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적이 나빠 이렇다할 배당도 하지않는 경영진들은 더욱 그렇다.

그저 주주들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무리해서 배당하는 기업들의 모습도 보인다.

이도저도 어려우면 마지막으로 이른바 총회꾼들에게라도 손을 내밀 수
밖에 없을게다.

올해는 경영진과 대주주를 긴장시키는 더 큰 요인이 등장했다.

기업인수합병(M&A)이라는 복병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달 열린 모종합금융회사의 임시주주총회에선 그런 긴장감이 팽팽히
느껴졌다.

주총직전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주주총회장 앞에 급정거한 봉고차에선 덩치큰 젊은이들이 내려 차앞에
도열하고 섰다.

말끔이 차려입은 모습이지만 뭔가 어색해 보인다.

이윽고 차에서 내린 중년의 신사를 호위하고 주총장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는 정치판에라도 온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미 주총장안에는 상대방에서 동원했음직한 젊은이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반주주들은 별로 없는듯 했다.

주로 양측이 동원한 주주들인 것 같았다.

다행히 주총은 별다른 사고없이 진행됐고 경영권분쟁은 일단 성공적인
방어로 끝났으나 혹시나 불상사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표정들이었다.

외견상으론 조용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당사간의 싸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다.

수백억원의 자금이 동원됐는가 하면 법원에 제기된 소송만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변호사들만 살판났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다.

이런 저런 비용을 합쳐 보면 형편없는 마이너스섬 게임이다.

물론 당사자 모두 할말이 있을 것이다.

주주의 권리를 무시했다거나 편법을 동원해 경영권을 뺏으려한다는 등
이유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원인을 뒤로 접어두고 그 결과를 보면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가.

우선 기업인수합병(M&A)의 원칙이 제대로 마련돼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국내의 인수합병역사는 아직 초창기로 제도적인 정비기에 있긴 하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와 정책의 시행에 앞서 충분한 토론과 방향설정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증권거래법 200조의 대량소유제한폐지를 눈앞에 두고도 관련제도의
정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은 설마 대기업이 넘어가겠는가 하는 분위기였다.

이제 발등의 불이 되고난 후에 서두르는 모습이다.

기업내에 인수합병문제에 관해 전문가가 없다는데도 문제가 있다.

대주주들의 무관심에도 그 원인의 일단은 있다.

그 결과는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을 때 방어비용이 지나치게 커진다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비전이 없이 무분별하게 시도하는 인수합병도 문제다.

비싼 가격을 제시한다고 해서 무조건 회사를 넘기는 일은 기업의 성장에
해만 될뿐이다.

지난 90년 미국에서 타임사가 워너커뮤니케이션을 인수하려 했을 때의
일이다.

파라마운트사가 타임사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으나 워너사의 이사회는
타임사에 경영권을 넘겼다.

파라마운트사는 당시 델라웨어법정에 이를 제소했으나 법원은 타임사의
손을 들어줬다.

기업의 장래를 생각해서 경영권분쟁을 처리한다는 원칙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델라웨어는 기업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꼽힌다.

새로 설립되는 기업의 출생지도 이곳이 가장 많다.

포쳔지가 선정하는 5백대 기업의 50%이상이 이곳에 호적을 갖고 있을
정도다.

실제 본사와 공장은 다른 곳에 두더라도 주소지만은 델라웨어에 두는
기업이 많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곳의 상법이 다른 곳에 비해 기업들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M&A공격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기 좋도록 제도가 정비돼 있다는 점도
그중 하나다.

설령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그 결과를 예측가능케 하는 수많은
판례가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얘기다.

투명한 법과 제도가 기업을 편하게 한다는 델라웨어법의 교훈을 정책
당국자들은 새겨두어야 할 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