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수는 오늘 일찍 귀가했다.

헬스클럽에서도 다른 날보다 너무 경쾌한 컨디션으로 운동을 많이 했고
일찍 돌아 온 것은 재수를 하고 있는 첫째딸 미아가 저녁을 같이 먹고
백화점에 쇼핑을 같이 가자고 해서였다.

그 애는 요새 자꾸 옷을 새것으로 입고 싶어 했다.

혹시 애인이라도 생긴것이 아닌가, 오늘은 그 애와 격의없는 대화를 하고
싶다.

같이 대화를 하는 것을 아이들쪽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모녀간의 대화도 많이 생략이 되고 재수학원에서 미술
학원으로 뺑뺑 도는 나날이 되고 만다.

남의 병만 고쳐주고 들어줄 것이 아니라 나의 딸에게 좋은 의논상대가
되어줘야겠다.

6시에 집에서 약속을 했는데 미아는 6시반이 넘어도 전화조차 없다.

속이 상한 공인수는 그 애의 삐삐에다 신호음을 넣어본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삐삐를 끄고 있는것 같다.

약이 오른 공인수는 루치오달라의 노래를 듣기 위해 CD를 걸었다.

그의 노래도 지금은 별로 큰 위로를 못해준다.

노래의 효과라는 것은 지극히 정서가 안정되어 있을때 특별한 감명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몹시 날카로운 감정으로 서성거리고 있을때 미아가 돌아왔다.

그 애는 자기 아버지를 많이 닮은 얼굴에 급한 성격이나 날카롭고
비판적인 점들이 공인수를 닮았다.

"늦으면 전화라도 넣어야지"

"미안해 엄마. 사실은 귀가 도중에 재미있는 일이 좀 있었어"

"어서 옷벗고 세수하고 빨리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그리고 오늘은
재킷도 사달라며?"

그녀는 자기의 기분을 죽이고 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대한의 인내를
한다.

"엄마, 내가 새벽에 영어회화학원 미국여자 낸시 캘럼의 회화 들으러
다녔지 않아? 벌써 오래된 일인데, 그때 내옆에 앉았던 남자가 있는데,
삼수생인지 무언지 좀 나이가 든 학생이 있었어.

그 남자가 그 다음에는 학원에 안 와서 참 궁금했는데 오늘 길건너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래서 오랜만에 남자냄새 나는 남자와 커피 한잔하고 떠드느라고
늦었어. 굉장한 멋쟁이 오빠야"

"삼수생 같은 얼간이 둔재는 안 만나는게 좋아. 둔재는 선천성이니까"

"아냐 엄마. 에디슨도 삼수생이 됐을 거야. 요새 살았다면. 하하하"

"그 애가 과학자냐? 과학하는 애냐구?"

"엄마, 너무 재수생을 무시하지 마. 나도 재수생 아니우. 내가 못 나서
재수생이우? 재수가 없어서 일류에 못 갔으니까 재수생이지.

악착스레 다시 하고 있는것 알아요? 그 사람은 이제 그만 포기했대.

그래서 영어나 가끔 들으러 다닌대. 예쁜 미국여자의 아름다운 음악같은
발음을 들으러 왔었대"

"공부하러 온게 아니구? 그런 애는 영 가망이 없는걸"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