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일하게 된후 가장 낯설게 다가온 것은 바로 "명함"문화다.

비즈니스의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운 호주에선 명함은 줘도 그만 안줘도
그만이다.

하지만 헌국은 다르다.

명함을 주고 받는 것은 거의 의무에 가깝다.

명함도 그저 명함이 아니다.

한국 기업인들의 명함에는 열이면 여섯 금박이름이 박혀있다.

특히 직책이 위로 올라갈수록 광채가 더해진다.

처음 이런 명함을 받아들었을 땐 약간 우스웠던 것이 사실이다.

호주에서 이같은 명함을 내민다면 분명 거들먹대는 뻔뻔스런 사람으로
찍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시아권에서 금색이 "부"를 상징하는 색깔이라는 설명을 듣고
이해를 할 수는 있었다.

한국인 명함의 또다른 특징은 직함이 줄줄이 적혀있다는 점.

이름 전화번호 팩스번호는 뒷전이다.

무슨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가 조목조목 상세하게 적혀있다.

마치 언제라도 꺼내들 수 있는 "미니 이력서"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또한 "출세지향적"인 한국사회와 고위층이 갖는 파워에 대한 배경설명을
들은 후에야 고개를 끄덕인 대목이었다.

이렇게 볼때 한국인의 명함은 단지 "이름표"가 아닌 자신의 업무결정권과
영향력을 말없이 보여주는 증명서인 셈이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이름하나 달랑 적힌 나의 명함을 보며 이상해하던
한국 사업가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한국의 문화에 젖어 간혹 직책이 적혀있지 않은
명함을 받아들면 꼭 추가질문을 하게 됐다.

한국에서 명함이 보다 중요한 이유는 매우 실용적인 측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의 절반이상은 김.이.박.최.정씨중 하나라고 봐도 될 것같다.

나의 친구중에는 모든 한국인들이 "김씨"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똑같은 성을 사용하다보면 성만으로는 도저히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소속과 이름을 명확히 적어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명함이
꼭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비즈니스 컨설팅을 할 때 호주고객들에게 한국에서 명함이
갖는 의미를 가장 먼저 이야기해준다.

또 한국고객들에게는 호주인들이 혹시 받은 명함을 함부로 주머니에
구겨넣더라도 너무 기분상해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사업협상의 첫걸음인 명함교환에서부터 첫인상이 망가진다면 그 협상의
결과야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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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현재 호주 노스 아시아 비즈니스 엔터프라이즈사의 한국지사에서
이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