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점심자리에서 어울리지 않게도 희곡 "파랑새"가 화두가 됐었다.

행복은 먼데가 아니라 바로 곁에 있더라는 그 유명한 작품 말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게 무엇이냐는 수준의 고상한 대화자리는 물론 아니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는 주인공 "찌루찌루와 미찌루"남매의 이름이 그날의
소재였다.

하나같이 문학의 "문"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기에 처음나온 말부터가
황당했다.

아마 일본사람의 작품 같다는 것이다.

웃기는 소리라며 다른 사람이 정정을 하고 나섰다.

영어로된 원작엔 "치루치루와 미치루"인데 혀 짧은 일본사람들이 번역을
하다 그렇게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TV 어린이프로그램에서도 "치르치르와 미치르"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럴듯 했다.

급기야 빙그레 웃고 있던 옆자리의 젊은이가 죄송하다며 끼어들기에
이르렀다.

벨기에의 작가 마테를링크가 프랑스어로 쓴 작품이며 주인공의 이름은
"틸틸과 미틸(Tyltyl, Mytyl)"이라는 것이다.

어찌나 쑥쓰러웠던지...

돌아와서 백과사전을 뒤졌더니 거기에도 "치르치르와 미치르"였다.

희곡 파랑새를 번역한 대부분의 책들은 제맘대로 였다.

끝내 불문학을 전공한 후배를 동원하고 나서야 그 젊은이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다른 얘기가 아니다.

도데체 근본부터 잘못됐는데 그것도 모르면서 엉뚱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자다가 봉창 긁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다.

비단 번역본이나 TV프로그램 백과사전의 문제만이 아니다.

경제 얘기로 돌아가보자.

근본을 고칠 생각은 않고 표시나는 일만 찾으니 정책이 제대로 갈리
만무다.

얼마전에 정부와 여당이 1억원까지는 상속.증여세를 면세해주는
저축상품을 내놓았다.

금융실명제로 숨어버린 돈을 햇빛 아래로 끌어내고 저축을 늘리기 위한
조치라는 게 그 배경이다.

과연 그런지 따져볼 일이다.

금융실명제가 갑자기 실시되는 바람에 장독에 묻어놓은 현찰이 있다고
치자.

이걸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냥 주면 그만이다.

그 돈을 꺼내, 일부러 은행에 가서 자식의 이름으로 예금을 해가며
물려주려 할 답답한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실명제를 두려워할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에게 1억원까지는 세금을
깎아줄테니 저금을 해서 물려주라고 하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다.

그동안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의 고민은 다른데 있었다.

숨겨놓은 현찰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명의로 돼있는 금융자산을 세금을
적게 물고 물려주는 것이다.

이번에 풀린게 바로 이 "민원"이다.

이젠 당당하게 넘겨줘도 된다.

새 저축은 들어오지 않게 돼있다.

들어와도 극히 미량일 것임에 틀림없다.

단지 부친의 계좌가 자식의 계좌로 바뀔 뿐이다.

결국 저축은 늘지 않고 오히려 부유층으로부터 걷어야 할 세금만 그만큼
깎아주고만 꼴이 되고 말았다.

하나 더 보자.

국제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어린이의 해외유학을 막기로 했단다.

어린이들의 조기유학에 대해서는 유학자금을 보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국제수지 적자를 줄이자는 건 좋지만 어디 막을 게 없어서 교육을
막는다는 말인가.

없는 돈을 마련해서라도 지원해야 할 일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두가지 사례 모두 근본을 도외시한데서 나온 것이라는 데 할말이 있을 수
없다.

국제수지 적자는 경쟁력을 높이는 길로 해결해야 한다.

애들 교육을 막아 돈을 못쓰게 할 것이 아니라 기업의 애로를 풀어주어
돈을 쉽게 벌도록 하는 게 정석이다.

경제살리기도 금융실명제를 푸는 게 아니라 고비용저효율 구조 개선과
허리띠 졸라매기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로 접근하는 게 순리다.

새 경제팀이 출범했다.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기사회생의 묘수를 찾으려 들 것임에 틀림없다.

보궐선거 패배로 민심이반이 확인됐고 대통령선거까지 남아 있으니
경제정책이 상궤를 벗어나기 십상이다.

벌써부터 증폭되고 있는 금융실명제 보완론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도 그래서다.

어려울 때일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한다.

바탕을 다지지 않고 묘수를 찾다보면 상황만 왜곡된다.

무엇이 잘못됐는 지를 모르면서 기교를 부리면 "틸틸"이 "찌루찌루"가
된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에 민심과 표로 경제를 다스리지않고 경제로 세상을
다스리게 하는 게 새 경제부총리의 할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