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인사정책에 있어서도 성군다운 금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자리의 적임자라고 생각되면 임기와 상관없이
그 자리를 계속 맡기었으니 황희(1361~1452)가 세종 13년(1431)에 69세로
영의정에 올라 세종 31년(1449)에 87세로 치사하기까지 18년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세종이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보내서 8년동안을 그 자리에 있게
하였던 것도 그런 맥락의 인사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김종서를 예조판서로 옮겨 놓고서도 4년동안을 그대로 그 자리
에 있게 한다.

국조 전례의 기틀을 다지고 국왕의 일거수 일투족과 왕실의 일동일정을
규제하는 의례를 마련하며 대외 외교 의전을 갖추어 놓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예조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천명하였으니 예치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어야
하므로 세종은 재위 이래 예전 편찬에 주력하여 "국조오례의"를 비롯한 많은
의례의 기준서들을 편찬해 왔지만 아직도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계속 보완할
뜻이 있었으므로 김종서를 예조판서로 계속 묶어두었던 것이다.

세종의 이런 김종서에 대한 권우는 필연 경쟁적인 위치에 있던 다른 신하들
의 시기를 불러오게 마련이지만 지난날 박문호의 참소 사건을 겪었던 세종과
김종서가 워낙 조심하였기 때문에 그럴 틈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김종서를 헐뜯는 일이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오게 되었다.

세종 26년(1444) 12월5일에 예조좌랑(정6품)이 된 이선로가 사헌부에서
고신에 서경을 하지 않는다 하여 사직소를 올린 것이 발단이 된다.

5품이하의 관직을 받으면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관직을 받은 당사자는 물론
내외 4대조까지 허물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여 그 내용을 적은 고신에
그 자리에 임명해도 되는 인물이라는 확인을 해서 보내는 것을 서경이라
하는데 이런 신원조회과정에서 허물이 있는 것이 밝혀지면 서경을 하지 않아
그 임명을 저지하게 되는바 신청한지 50일이 지나도 서경을 하지 않으면
임금께 사유를 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별한 혐의가 없는 한 대체로 이 서경은 요식행위로 이루어져
통과되게 되었고 약간의 혐의가 있다해도 해당관청 담당관들의 재량에 따라
처리되는 것이라 안면으로라도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선로는 자신의 재주와 학문만 믿고 오만한 태도를 보여 저들의
미움을 사서 그 부친의 허물까지 들춰내는 망신을 당하며 서경을 받지
못한다.

이에 이선로는 내관을 통해 세종께 아뢰기를 자신이 왕명을 받들어 지리서를
보았기 때문에 사헌부에서 이를 비웃어 고신에 서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세종은 매우 노하여 승정원에 전지하여 사실 여부를 조사
해 아뢰고 각 사는 이선로의 고신에 속히 서경해 보내며 이선로의 사직서는
속히 돌려주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승정원에서 이선로의 사직서를 돌려 주니 이선로는 이를 다시 올리려
한다.

이때 마침 예조판서 김종서가 승정원에 볼 일이 있어 나왔다가 이를 보고
이선로를 말려 사직소를 다시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실 양사에서 이선로의 고신에 서경하지 않은 것은 이선로가
지리학에 통하여 세종의 지우를 받는 것이 얄미울뿐 아니라 지난 11월19일에
집현전 수찬으로 있으면서 풍수설을 이끌어 개천물을 맑게 해야 한다고
상소한 까닭에 개천가에 사는 사람들이 오물 투척을 관청으로부터 단속받게
된 사실이 미웠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예조좌랑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하려고 사헌부에서는 서경하지
않았던 것인데 뜻밖에 예조판서 김종서가 중간에 들어 그를 만류하여 받아
들이니 지난번 이선로의 상소때 앞장서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도 무슨
관련이 있는 듯 생각하여 화살을 김종서에게 돌린다.

사헌부가 12월18일 김종서를 탄핵한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조판서 김종서는 한 조의 장관으로서 맡은 바 제사를 즉시 검찰하여
거행하지 않았고 공문서의 이첩을 늑장부리었으며, 또 탄핵하여 물었을때
말씨가 심히 광패하여 대간의 기강을 멸시하였사오니 그 죄가 작지
않사옵니다.

엎드려 성상의 재량을 바라옵니다"

세종이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탄핵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논하지도 말라고 특명을 내린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종서는 다음 날인 12월19일에 즉각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한다.

"신은 성품이 본디 어둡고 어리석은데 더하여 배우지 못하여 무릇 백가지
일을 하는 것이 다 남만 못하고 고례를 상고하는데는 더욱 모자라는 바가
됩니다.

본조는 온갖 예법을 관장하고 제사를 받들며 빈객을 응대하니 처지와 임무가
매우 중요한지라 용렬한 인재가 감당할 곳이 아닙니다.

이에 명령을 받은 이래 항상 걸맞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조심스럽고
황송함으로 몸둘 곳을 잃었으나 성은으로 인연하게 됨이 망극하여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조석으로 힘을 다하여 봉공하였었습니다.

그러나 모기의 힘으로는 산을 질수 없고 서툰 장인은 한갓 스스로 손만
다칠 뿐이라 4년 사이에 실수한 바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실수가 만약 저로부터 말미암았다면 탄핵하는 글이 이르자마자 문득
허물을 자복하였지 어찌 감히 틀렸다는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사헌부가 탄핵하는 바의 일은 사실 신이 범한 바가 아닌데 탄핵하는
글이 실정을 지나치니 신도 또한 무복(거짓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답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속일 뜻이 없었기에 곧 스스로 후회하고 책망하여 몸둘 바를 몰라
했었습니다.

사헌부가 신의 죄를 헤아리는데 광패하다 하였습니다.

단지 미쳤다고만 해도 착하지 않은 형상이 이미 드러나는데 또 이르기를
패악하다 하니 사람의 악덕이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일컫기를 저자에서 매맞는 것 같다고 하였으니 부끄러움의 심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저자에서 매 맞는 것은 일시에 그치지만 광패악덕으로 덮어 씌운다면 어찌
신의 평생 부끄러움 뿐이겠습니까.

문득 또한 자손 후세의 허물일 것입니다.

지금같이 성군이 다스리는 시대에는 비록 문지기 하인이라도 응당 이렇게
광패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육조의 수장이겠습니까.

신의 광패함으로써 오래 예관에 있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또 신의 나이가 60을 넘어서니 점점 쇠약해져서 앞도 잃고 뒤도 잃어
버립니다.

기왕의 실수로 헤아려 보건대 장래는 곧 실수하는 바가 필시 열배가 될
터이니 비록 성상의 자애가 곡진히 비호하신다 해도 그 물론(뭇 사람의 평판)
이야 어찌 하시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의 자비가 신의 간절하고 긴박함을 가련하게
여기시고 신의 부르짖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지극한 소원을 굽어 좇으시어
신의 직책을 면하게 하십시오" 김종서의 불같은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과격한 사직소이다.

이에 대해 세종은 탄핵 상소의 자구 풀이까지 하는 과잉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눙치면서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믿어야 부덕하게 되는 것이지
임금이 듣고 믿지 않는데야 무슨 부덕이 되겠느냐며 김종서를 절대 신임하고
있으니 부끄러워 할 것 없다고 달랜다.

사실 이때 세종대왕은 20세의 청년 왕자인 다섯째 아드님 광평대군을 졸지에
잃은 지 11일밖에 안된 상태에 있었다.

슬픔으로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사건이 터졌으니 보통
군주 같았으면 김종서의 이런 과격한 사직소를 귀찮게 여기었음직도 하련만
세종은 현군인지라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오히려 김종서를 위로하고 있다.

광평대군이 폭졸한 것을 세종실록에서는 다만 창진을 앓다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태종왕자 경녕군비(1395~1458)의 5대손인 지봉 이수광
(1563~1628)이 지은 "지봉류설"권 18에서는 광평대군이 물고기를 먹다가
물고기 가시가 목에 걸려 돌아갔다 하고 있으니 사실이 그렇다면 생때같은
아드님을 비명에 보냈었던 세종의 슬픔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더구나 광평대군이 어렸을때 관상사가 보고서 굶어 죽을 상이라 하니 세종이
내 아들을 굶어 죽게 할 리가 있겠느냐며 나라의 동적전까지 하사하였는데
과연 물고기 가시에 걸려 굶어 죽었다 하였으니 그 참혹한 정황이 어떠하였
겠는가.

그러나 세종은 역시 현군답게 그것이 운명이라면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빨리 체념하는 듯하니 광평대군을 치료하다 그를 구하지 못한 의원 배상문을
국문하여 죄를 물어야 한다는 승정원과 사헌부의 계청을 일축하고 상문의
죄가 아니라 왕자의 명이니 거론하지 말라고 단안을 내린다.

그런데 다음해인 세종 27년(1445) 1월7일에 이제 19세가 된 제7왕자 평원
대군 임이 천연두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이르더니 끝내 1월16일에 돌아가고
만다.

생때같은 두 왕자를 불과 달포사이에 갑작스런 병환으로 잃고나자 세종대왕
은 아무리 성군이라 하나 도저히 자신을 지탱할수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1월18일에는 혹시 각지방에서 옥사를 잘못 다스려 백성의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서 이런 천벌이 내리는가 하고 김종서 등을 불러 이 뜻을
전하고 각도 감사에서 유서를 내려 형옥을 정당하게 다스리라 신칙한다.

그리고 다시 진양대군(뒷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우의정 신개, 좌찬성
하연, 좌참찬 권제, 예조판서 김종서를 불러 왕세자에게 선위할 뜻을 전하게
한다.

"근년 수재와 한재가 잇따르고, 또 묵은 병이 떠나지 않으며 두 아들을
연거푸 잃으니 하늘이 돕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선위하려는 주된
이유였다.

김종서 등은 울면서 이를 극구 만류하며 죽어도 선위하는 교지는 받들수
없다고 버티니 세종도 할수 없이 이를 뒷날로 미룬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