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일찌기 "생사는 명에 있고 부귀는 하늘에 있다"고 했다.

92세로 타계한 중국의 최고 실권자 등소평 또한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헤쳐 오면서 공자가 말한 천명을 따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등소평은 평생에 세차례나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

1932년 국민당군 방어전술 논쟁에서 모택동노선을 지지하다가 중국 공산당
현서기직에서 해임되어 한때 수감된 것이 그 첫번째 고초였다.

등소평의 시련은 1949년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에도 이어졌다.

61년 모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유소기와 더불어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급진적 농촌사회주의화운동이었던 인민공사의 군정노선을
취하다가 극자파로 낙인 찍혀 68년 모와 임표에 의해 벽지로 유배를
당했다.

76년에는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등 4인방 문혁파와의 권력투쟁에서
그의 실용주의 정책이 수정주의 자본주의 노선으로 몰려 또다시 숙청되었다.

이처럼 등소평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가차없이 정적을 제거하는데 수완이
뛰어난 모에 의해 숙청을 당하고도 살아남아 권력의 정상에 오를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지혜와 능력,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요인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천왕을 따라 기회를 잡은
지혜였다.

두번째 숙청시 임표의 제거 소생을 듣고 모에게 두번이나 참회서신을
보냈는가하면 세번째 숙청시에는 자신의 노선이 착오였다고 모에게 용서를
빌므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모의 사후 권력의 정점에 오른 그가 자아비판한 수정주의를 개혁.
개방정책으로 다시 추진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켰다.

모가 일찌기 그를 "부드러움속에 강함이 있고 비단속에 침을 지녔다"고
평한 것이 맞아 떨어진다.

또한 경제난국은 헤쳐나가는 능력, 당과 군부의 끈끈한 인맥, 다른
혁명 1세대들이 따를수 없는 건강등이 그의 재기에 큰 힘이 되었다.

모 역시 그의 그러한 장점들을 인정한 나머지 그를 제거할 때도
재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을런지 모른다.

모가 그를 후계자의 한사람으로 자주 꼽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언론인 해리슨 솔즈베리가 얘기한 것처럼 그는 이 세상에 단
한사람인 진정한 불도옹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