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민족통일연 연구위원>

최근들어 북한 고위층 인사들의 탈북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황장엽의 한국행 망명신청은 남북한 모두에게 실로 큰 사건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그는 북한의 실세집단인 노동당 비서들중의 한 사람이며 주체사상에서
제기되는 각종 명제들을 체계화시킨 주인공이다.

또한 김일성.김정일 부자간 세습을 정교하게 정당화하는데 기여했던
인물임에도 대내외적으로 상당한 학자적 신망을 동시에 받았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같은 황장엽이 왜 망명길에 오를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그의 망명결정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그는 자신이 만든 이념과 북한의 현실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괴리에 대해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느꼈으며 이것이 망명결심의 근원이
되었을것이다.

즉, 사회주의 변혁 이후 침체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는 경제와 날로
심각해지는 식량난을 목격하면서 주체사상이란 거대한 이념을 체계화시켰던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북한의 장래에 대해 상대적으로 합리적일수 있는 자신의 견해가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망명하기로 결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동구및 소련 사회주의체제 대변혁 그리고 김일성사망으로 이어지는
대내외적 변화에 대한 적응과정에서 고위 엘리트간에는 노선에 대한
논의들이 심도 있게 이루어졌을 것이고 이것은 점차 갈등의 차원으로
성숙해갔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당국은 주민들의 끼니 걱정을 해결해
주지못하면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총폭탄"운운하면서 정권 보위만을
강조해오고 있다.

원로 지식인이자 정치인인 황은 개방보다는 보수로 치닫는 체제에
대해 자신의 미력함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그가 체계화한 주체사상만 하더라도 때로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주체를 훼손하지 않는한 서방세계와의 교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김정일은 적극적인 개방은 외면하고 군부에 의존하면서
병영체제 구축을 통한 내부단속 강화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그가 망명을 결심한것은 개인적 번민과 함께 북한의 장래에
대한 엘리트 내부의 노선 논쟁에서 강경보수주의가 압도한 결과라고
할수 있다.

황의 한국행 망명신청은 북한, 특히 김정일로서는 가장 우려했던 사건이
아닐수 없다.

다시말해 이유야 어떠하든 지식인과 엘리트의 체제에 대한 이반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1992년초 김정일은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당의 총노선"이란
글을 통해 동구 사회주의 대변혁의 요인을 분석한 바 있다.

김정일은 여기서 동구 사회주의체제들을 무너뜨린 중요한 사회세력으로
소위 "내부의 적"을 지칭하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지식인과 엘리트층을
말한다.

이같은 관점에서 김정일은 지식인을 체제의 보루라고 추껴 세우면서
홀대받아왔던 그들을 위로해 왔다.

또한 간부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면서 인민 속에 파고드는 정치를
행해줄 것을 강조하였다.

현 체제를 지키기 위한 김정일의 이같은 분석과 처방이 꽤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효를 거두기에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김정일을 중심으로한 북한 당국이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지식인과 엘리트층의 결속을 그토록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과
엘리트는 체제에 대해 이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황장엽은 북한 최고의 지식인이자 엘리트로서,김정일이 우려한 "내부의
적"의 이반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황의 망명은 현 체제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식 사회주의"체제가 여러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존속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주민들에 대한 사상교양과 엘리트의
응집성을 꼽았던 점에 비추어 볼때 더욱 틀림없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그의 망명을 최대한 은폐하는 동시에 엘리트에 대한
사상검증과 통제를 강화할 것이다.

또 외부적으로는 한국을 겨냥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이미 북한 외교부는 우리의 납치극이라는 성명을 발표해 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현 북한체제의 위기가 당장 북한이라는 나라의
붕괴 그리고 남북한 통일로 연결될 것이라는 논리적 비약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체제의 위기가 변혁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체계의 총체적
붕괴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조건이란 우리의 정치.경제의 안정뿐만 아니라 주변구그이 입장을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유도할 수 있는 국제적 역량의 성숙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통일에 대한 염원만큼이나 자신을 점검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즉, 북한의 모험적 행동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안정된 남북한
관계의 구축을 모색하는 조건 하에서 북한의 변혁에 대비하는 대내외적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