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호 < 현대정보기술 사장 >

연초부터 국내 경제 환경이 몹시 불안하다.

노동법 개정으로 빚어진 파업사태와 최근의 대형 부도 사태와 같은 불황의
연쇄고리는 좀체로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수출 주력 품목들의 경쟁력 저하로 인한 수출 부진, 장기간 불황으로 인한
내수시장 침체, 기술 경쟁력 열세로 세계 시장 점유율의 한계점 도달,
고비용 저효율에 따른 가격경쟁력 상실 등, 우리 경제의 현실은 심각한
상황에 봉착해있다.

작년 한해동안 일자리를 잃은 사람만 10만명이 넘는다는 통계지표도
어두운 우리 경제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업들은 어려운 경영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불가피한 타개책으로 인원
감축제도를 조심스럽게 도입하고 있다.

직장을 떠나는 사람도,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도 모두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경제의 현실이다.

얼마전 모기업의 최고경영자로부터 리엔지니어링의 도입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람을 줄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국내의 경영자들은 대부분 기업의 리엔지니어링을 다운사이징 즉 사람을
줄이고 조직을 축소하는 감량경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은 지난 80년대에 빠르게 추격해오던 일본과 유럽세에 밀리고 내수가
한계에 달함으로써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

기업들은 인력과 기구의 간소화를 통해 비용절감을 도모함으로써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쟁력을 높인다는 다운사이징 선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미국 기업들은 보다 경쟁력을 갖춘 조직으로 회생할 수 있었고,
90년대 접어들면서 다시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경제의 부활이 감량경영에 의한 기업조직의 슬럼화만으로
일궈진 것은 분명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일본 히타치사의 미타 가스시게 회장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 기업들이 명예퇴직 등으로 인원 감축을 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은 적이 있다.

또한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들은 대대적인 감원이 발표된지
2년후에는 기업의 재무구조가 더욱 악화된다는 논문을 내놓기도 했다.

다운사이징의 초기에는 임금 등의 비용 절감을 통한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비용 절감 효과
마저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경영 부실을 오로지 감원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발상부터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엔지니어링은 사람을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전개되는 경영 전략이
아니다.

리엔지니어링이란 비용, 품질, 서비스, 신속성과 같은 핵심부문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이루기 위해 비지니스 프로세스를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하는 과정인 것이다.

비지니스 프로세스를 재설계한다는 것은 생산이나 사무의 절차에 불필요한
로스를 감소시키고, 첨단화된 자동화 시스템으로 업무의 흐름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경비를 절약하고, 1인당 생산성을 높이도록
재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시스템을 구축하면 프로세스별로 소요 인력의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절감된 인력을 영업이나 마케팅, 신규사업 쪽으로 보강해 더욱
왕성한 기업 활동을 펼쳐갈 수 있게 된다.

이렇듯 리엔지니어링이란 프로세스 자체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비지니스
시스템 전체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엔지니어링과 정보기술은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정보기술은 리엔지니어링을 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인 것이다.

미국이 리엔지니어링이라는 신경영 기법으로 회생하게 된 이면에는 어느
나라보다 발달한 정보기술이 기업의 모든 프로세서를 효율적으로 재구축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정보기술 투자 비용을 단순히 전산경비 차원에서
이해하는 기업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정보기술 분야의 투자는 경기가 좋을 때 보자는 식이다.

이것은 단기간의 비용효과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의 기업 풍토에서
정보화에 대한 투자가 곧바로 계수화된 효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경영자들이 갖게 되는 편견이다.

그러나 정보기술에 대한 관심과 투자없이 조직과 인력에 대해서만 메스를
가한다면 막상 경기가 회복되었을 때 축소된 규모와 내실을 다시 확장하기가
어렵게 된다.

오늘날 정보화는 단지 비용절감의 수단이 아니라 국제 경제 시대에서
존립하기 위한 기본적인 경영 인프라로 부상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장기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보인프라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바탕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기업 프로세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의 정보 산업은 미국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결국 정보기술의 발전은 깊은 동면에 빠져 있는 거대한 공룡기업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제 우리도 단순히 허리띠 졸라매기로 일관하기보다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위기 관리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 우리 경제가 매우 위태로운 국면에 처해 있음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다.

하지만 위기를 곧 기회로 삼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일은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겨울추위가 매서울수록 봄에 돋아나는 풀의 색깔은 짙은 방법이다.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슬기로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