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웅은 공박사와 대화를 하다가 문득 라미주단 김영신 사장의 명함을
떠올린다.

천장에서 공박사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다.

그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부처와 할아버지였는데 지금은
공박사다.

"지영웅씨, 금요애인부터 끊는다고 해 놓고 왜 김영신 사장은 또
불러내려고 해?"

"아닙니다. 박사님, 김사장님은요 소문이 나 있걸랑요.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만 춰줘도 팁을 몇십만원씩 준다구요.

우리 세계에선 김사장님은 진짜 멋쟁이로 알려졌어요.

반드시 침대에 가자고 안 하시는 것으로 소문난 멋쟁이이니까 저도
춤만 춰주고 팁을 듬뿍 주는 여자가 있으면 그건 괜찮지 않습니까?
허락해주이소, 싸부"

어느새 공박사는 그의 사부로 되어 있다.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공박사는 예삿사람이 아니라 사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유식하고 귀여운 사부로 보살의 얼굴을 닮은 사부다.

지영웅은 고급스런 파텍시계를 들여다본다.

박사장과 만나기로 한 것은 8시에 장미 모텔의 지하바인 "록색바다"였다.

그는 한번 간 모텔에 그 다음 주에는 안간다.

또 같은 여자하고는 같은 모텔에 들어가도 다른 여자하고는 안 간다.

그는 스스로가 지켜온 룰을 굳세게 지키는데, 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할때
이 부인하고도 오고, 저 부인하고도 오는 치사하고 뻔뻔한 놈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기는 돈많은 플레이보이를 연출하면서 팁도 두둑히 주고 호텔
종업원들에게 예의 바르고 팁이 후한 손님으로 행세할 수 있게끔 선심을
쓰고 다녔다.

그래야만 본색이 탄로가 나더라도 욕을 덜 먹는 것이다.

그는 호텔의 룸서비스로 꼭 석달을 일했는데, 제일 처음 콜보이가
된 것도 그 호텔에서 어떤 아줌마에게 찍히는 바람에 시작된 직업
전환이었다.

어느날 오후에 무료하게 졸고 있는데 그에게로 전화가 왔다.

"키가 크고 엘비스 프레슬리같이 생긴 3층 룸서비스 좀 대주세요.
턱밑에 까만 점이 있는 미남자요"

"바로 전데요"

"언제가 노는 날이지요? 데이트를 하고 싶어서요"

"저하구요?"

"네. 바로 오는 17일이 내 생일인데요.

같이 춤좀 추러 가자구요.

거창하게 모실게, 딱 두세시간 춤만 춰주면 돼요.

시간당 달라는대로 줄게"

한달 월급이래야 얼마 안 되었다.

팁을 받는게 수입으로 계산되는 전부인데 씀씀이가 센 그로선 한달
수입이래야 겨우 100만원도 안된다.

하루종일 물 날라다주고 컴컴한 복도를 왔다 갔다하면서 굽실굽실하고
팁을 잔돈으로 받아 챙기는 치사한 나날이었다.

그때 그는 여대생과 사귀고 있었는데 한달에 두번 있는 휴일이면 만났고,
그 때마다 택시로 다녔더니 그 한 인물나는 일류대학 미대 아가씨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인상을 가끔 썼다.

"요새 차도 없는 남자가 어디 있어?"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