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재벌기업의 무모한 경영 결과가 나라 전체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지난
주말, 울적한 기분을 단숨에 씻어주는 한바탕의 소나가와도 같은 청량한
보도에 접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15년간 6억달러의 거금을 자선 및 공익사업에 기부해온 찰스 피니라는
미국 기업가에 관한 기사였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한 토막의 인정가화에 대한 감동의 차원을 넘어
한 인물을 향한 지극한 외경심마저 느꼈다.

첫째는 기부 행위의 철저한 익명성에 대한 외경심이다.

얼굴 없는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밝히려는 미국 언론의 끈질긴 추적을 끝내
따돌린채 성서의 가르침 그대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끔 선을
행한 그는 기업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자의 풍모에 가깝다.

뒤늦게 그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그 자신의 본의와 상관없이 최근에
그의 회사를 인수한 사람의 제보에 의해서였다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둘째는 상식을 벗어나는 검소성에 대한 외경심이다.

기부액만 자그마치 6억 달러에 달하는 재력가인 그의 살아가는 모양은
호주머니 사정이 별로 넉넉지 못한 나보다 외려 더 군색스런 편이다.

나 같은 사람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살림들이 그
부자한테는 없음을 깨닫고 나는 잠시 묘한 기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한테 돈은 매력적인 수 있지만 누구도 한 번에 두 켤레의 구두를
신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그의 말은 <아홉 컬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작가인 나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셋째는 달관한 듯한 인생관에 대한 외경심이다.

여전히 얼굴 드러내기를 거부한 채 뉴욕타임스기자와 가진 목소리만의
짧은 인터뷰에서 그는 거액의 기부 행위에 대한 이유를 "내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도 인간인데 어찌 그에게 필요한 것이 셋집에 렌트카와 15달러짜리
싸구려 시계뿐이었을까.

라면 몇 상자만 기부해도 고아들이나 무의탁 노인들을 집합시켜 폼을 잡고
기념촬영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네 인지상정인데, 그는 박애
정신이나 이익의 사회환원 따윈 거창한 구호와는 너무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들어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고 있다.

오히려 설명되지 않는 그 설명이 우리에게 그의 인품의 모든 것을 웅변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그런 기업인과 그런 기업정신이 살아 있는데 미국의 기업풍토가
마냥 부러워 보이는 오늘이다.

우리에게는 없는 기업정신을 미국이 가진 데서 오는 부러움보다 미국이
가진 기업정신을 우리는 못가진데서 오는 서글픔이 한층 더 도드라져 보이는
오늘의 한국 실정이다.

15달러짜리 시계를 15년째 차고 살면서 15년 동안에 6억달러를 익명으로
기부할 줄 아는 별쫑맞은 기업인을 우리나라도 한 명쯤 가졌으면 좋겠다.

일파만파로 번지는 한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만일 찰스 피니 같은
우리 기업인을 내 생전에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는 창담한
기분에 젖어든다.

무역수지의 심각한 역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사치품 소비재를 수입하지
않겠다는 대기업들의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참으로 고맙고도 유정한 말씀들이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우리 재벌들의 눈물겨운 노력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하지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전자회사가 자신의 라이벌 회사의
전자제품을 수입해다 고가로 판매함으로써 결국 자기 목을 자기 손으로
조르는 식의 자살적인 수입을 뒤늦게 자제하는 선에서 그칠게 아니라 찰스
피니의 기업정신같은, 이를테면 수입 원가가 전혀 없는 정신의 상품을
무제한으로 수입하려는 노력 또한 함께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찰스 피니의 말마따나 그 누구도 한 번에 두 켤레의 구두를 신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그 어떤 부자도 한 번에 두 인생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