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웅은 죄지은 아이처럼 그녀에게 사죄하면서 올바른 생활을 할 것을
맹세한다.

면담시간이 한시간을 정확하게 지나갔을때 간호사가 전화로 신호를
보낸다.

"예약은 없이 급한 환자분께서 오셨는데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미스김의 딱 떨어지는 사무적인 매너는 공박사가 늘 혀를 찰 정도로
칼날 같다.

"알았어요. 지영웅씨에게는 지난번에 그 약을 처방대로 지어서 주고요.

10분후에 환자를 들여보내요"

"지영웅씨, 그러면 일주일후에 얼마만큼 생활을 정리했는가 두고
보겠어요.

다시 오고 싶으면 간호사에게 예약하고 돌아가세요.

참 편두통이 별로 심하지 않으면 약은 안 받아가도 돼요.

당신은 약보다는 정신요법으로 나가야 될것 같네요.

그 중증의 황태자병을 약으로 다스릴 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자 코치님,
그러면..."

그리고 그녀는 지영웅이 일어서 나가기를 재촉하듯 일어섰고 지영웅은
괜히 아쉬운 듯이 지그시 공박사를 바라본다.

"면담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버리죠.아직도 할 말은 반의 반도
못 한것 같은데"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바쁜 날 아니에요? 금요일의 애인을 만나는 날
아닌가요?"

공박사는 나무라는 어투로 그를 몰아낸다.

"아닙니다. 저는 결정했다 하면 그냥 일직선으로 실행합니다.

월요일이고 수요일이고 금요일이고 전부 싹둑 잘라버리겠습니다"

"제발 그렇게 하십시오, 죽고 싶지 않거든.에이즈처럼 무서운 병이
얼마나 많은지 아셨지요? 아셨으면 굶는 것은 아니니까 깨끗이 청산해요.

맹세한대로 해요.

며칠전에는 멀쩡한 사람도 오늘은 에이즈에 감염됐을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생활입니다.

어떤 생활을 하느냐가 요새는 생명을 부지하느냐 일찍 죽느냐 하는
위기의 시대라구요.

알아 들었지요? 안녕히 가시고 깨끗하고 신선한 뉴스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행카드도 월요일의 애인에게 돌려주십시오"

"알아모셨습니다. 누가 나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저는
황홀합니다. 살것 같아요"

그 말만은 공박사가 듣기에도 진실인것 같다.

진정으로 관심 가져주는 이가 필요한 것이다.

"다음 면담시간을 기다려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공박사는 신바람을 내면서 돌아서 가는 그의 구부정한 어깨를 보면서
측은함을 느낀다.

그에게는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가족이, 어머니가 필요한 것이다.

공박사는 갑자기 "몸 판 돈은 안쓴다"고 내동댕이칠 수 있는 어머니나
누나가 그에게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영웅이 사뭇 자기 동생이나 아들인것
처럼 열성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