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학문하는 사람이다.

학문은 선비의 기본조건이고 임무다.

그러나 그 학문이 지향하는 목표는 오로지 "회포를 펴서 생민에
보익하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율곡은 선비를 "천민"이라고도 불렀다.

맹자는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여 (독선기신) 연마한 도를 통해 뜻을
얻으면 백성에게 혜택이 미치게 하여, 아울러 세상을 착하게하는 (겸선천하)
것이 선비의 당당한 모습이라고 했다.

따라서 인 의 충 신을 추구하는 선비가 조정에 참여해 벼슬을 하는 것은
결코 권력을 지향해서가 아니다.

임금과 백성을 위해 망신순국할 각오로 나서는 것이 선비다.

권력지향의 소인배를 "사대부", 선비를 "사군자"라고 구분해 부른 것도
그때문이다.

사군자뿐만 아니라 때를 만나지 못해 재야에서 독선기신하는 학자 은자도
선비다.

결국 참된 유학의 가치를 추구하는 도학정신의 실현주체인 모든 사람은
선비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에서 선비는 "예의 바탕" "사회의 원기"로 대접받았다.

"사론은 공론"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사임정치가 자리잡았던 조선왕조의
특색이었다.

엊그제 경북 청도에서 유림장을 지낸 인암 박효수는 평생 재야에서
독선기신하며 후학을 가르친 선비였다.

그는 한말의 거유 간재 전우의 문인인 덕천 성기운 (1877~1956)의
제자였다.

학통을 따진다면 영남학파가 아니라 기호학파 계열에 속하는 학자였다.

간재의 우리정신을 이어받은 덕천은 일제때 끝까지 창씨개명은 물론
호적조차 올리지 않는 것으로 조선의 유민임을 고집했다.

경찰에게 연행될 때마다 단식으로 항거했다.

이런 덕천의 생각은 해방뒤 미군정때도 호적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덕천의 학통을 이은 인암의 우리정신은 과연 어떤것 이었는지 궁금하다.

"...긴긴 밤 밝아 오지 않는데 어디가서 덕을 상고하겠는가.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길어 유풍이 없어지지 않으리"

충남 연기에 있는 덕천의 산소에는 덕천과 함께 공부했던 현곡 류영선이
지은 묘갈명 말미에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유림장이란 전통 행상에만 눈이 팔린 언론은 인암을 "마지막 선비"라고들
하고 있지만 선비는 갔다해도 "선비정신"마져 함께 사라지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