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는 자가 국경이고 호가 절재이며 본관이 순천이다.

태어난 곳은 충청도 공주목 요당면 비계실(비계곡)이니 현재의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비계실이 그곳이다.

공주에서 동북쪽으로 삼십리쯤 떨어진 곳으로 백제 고찰인 동혈사(현재는
동혈사로 쓰고 있다)가 있는 천태산의 남쪽 자락 끝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
이다.

천태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이 금강까지 이어지면서 첩첩산골을 만들어
놓은 곳이지만 서남쪽으로 흘러나가는 동혈천을 따라 전개되는 삼십리 긴
들이 금강까지 터져 나가 전경만은 일망무제하다.

그 긴 들 저편에는 공주의 진산인 공산이 붓끝처럼 솟아나서 아득한 자태의
문필봉으로 그림처럼 끝을 막아주고 그 아래로 금강이 굽이쳐 흐르니 어찌
이곳에서 문장과 지략을 겸비한 문무겸전의 대인물이 나지 않을수 있겠는가.

지금도 김종서의 생가터 바로 아래 우측에는 의당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어 계속 인재를 배출해 내고 있다.

충의를 지키다 참화를 입어 행장이 모두 인멸되었으므로 정확한 생년월일이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다행히 "문종실록" 권10 원년 신미(1451) 11월28일
임술조에 "우의정 김종서가 명년에 나이 70에 차게 된다 하여 벼슬에 나오지
아니하니 출사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문종 2년(1452)에 70세가 된다면 그의 출생년은 고려 우왕 9년(1383) 계해에
해당한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국사대사전"과 "한국인명대사전"에서 고려
공양왕 2년(1390) 출생이라 잘못 기재해 놓고 있다.

그래서 이 사전들이 출판되어 나온 1976년 이후에는 김종서의 출생연도를
의심없이 공양왕 2년(1390)으로 옮겨적고 있으니 1980년에 김종서의 탄생지
인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비계실 고택 유허지에 세워놓은 김종서장군 행적비
와 1987년에 김종서의 묘소 아래인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밤실(률곡)에
세워 놓은 신도비에도 그대로 잘못 새겨져 있다.

더구나 신도비에서는 이 출생연도를 확신하고서 "15세 소년으로 태종 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1390년 생이라 하더라도 16세이다)"고 기술하는 망발을
범하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작년(1995년) 1월에 출간되어 나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서까지도 이 잘못은 바로 잡아지고 있지 않다.

요즘 우리나라 학자들의 허술한 연구자세를 그대로 반영하는 일이라서
안타깝기 그지 없다.

"국조방목" 권1 태종 5년 을유방의 방목에 보면 김종서가 동진사 23인중에
들어 있으니 이 해에 문과에 급제한 것은 틀림없다.

[세종 20년(1438) 무오 식년시에서부터 동진사과를 정과로 고쳤다]

그러나 15세의 미성년자가 아니라 23세의 어엿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어떻든 이렇게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김종서는 문과 급제자들이
거치는 하위직부터 벼슬길에 나가게 되는 듯한데 "태종실록"에 그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종7품 상서원 직장때 부터이다.

이로부터 죽산 현감(종6품)을 거쳐 세종 즉위년(1418)에는 병조좌랑(정6품)
으로 오르는데 이때 상왕인 태종과 세종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세종의
신임을 독차지해 가게 된다.

그때의 상황을 용재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 권10에서 이렇게 기술
하고 있다.

"최 제학 흥효는 글씨 잘 쓰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는데 그 필적은
오로지 진나라 유익의 필체를 모방하였었다. 비록 붓놀림이 순수하고 익숙
했지만 거칠고 촌스러운 모습을 면하지는 못하였다. 태종이 친정하던 날
제학이 이조 낭청으로 입시하여 사람들의 고신을 쓰는데 붓을 꼼지락대며
오래도록 이루어 내지 못하자 김종서가 병조낭청으로 옆에 있다가 한 붓으로
수십장을 휘둘러 써내고 쓰기를 마친 다음 옥쇄를 찍는데 글씨와 옥쇄 자국
이 모두 단정하였다. 태종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쓸만한
인재로구나"하니 종서는 이로 말미암아 피어나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그해 11월29일에 강원도 토지조사 사업에 민원이 발생하자
김종서를 행대감찰(행대감찬)로 파견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는데 이때 세종의
나이 22세이고 김종서는 36세였다.

김종서는 현지로 내려가 민정을 살핀 다음 흉년으로 기민이 발생하였음을
확인하고 이들의 조세를 면제해 주기를 주청하니 세종은 대신인 변계량
(1369~1430)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종서의 청을 들어 준다.

이어 원년(1419) 3월6일에는 다시 김종서를 충청도 행대감찰로 파견하여
춘궁기의 민정을 살피게 하자 김종서는 충청도 기민이 12만2백40명인데
이들에게 나눠준 쌀이 1만1천3백11석이고 장이 9백49석이라는 자세한
보고를 올린다.

이런 기민한 행정능력으로 말미암아 세종은 더욱 김종서를 아끼게 되니
10월24일에는 사간원 우정언(정6품)으로 벼슬을 올려준다.

그리고 다음해인 세종2년(1420)에는 광주 판관(정5품)으로 벼슬을 올리고
의주판관 등을 거치게 하여 지방행정을 익히게 한 다음 세종5년(1423)
5월27일에는 사간원 우헌납(정5품)으로 불러 올려서 사헌부 지평(정5품),
이조정랑(정5품)등 요직을 거치게 한다.

그리고 세종 9년(1427) 1월18일에는 의정부 사인(정4품)으로 승진시키는데
이해 2월에 황해도에서 민원이 생기자 다시 김종서를 경차관으로 보내어
이를 해결하게 하고 이 공로로 7월4일에는 사헌부 집의(종3품)로 올려준다.

이렇게 김종서가 사법부의 실무를 총책임지게 되었을 때 세종의 맏형으로
세종에게 세자자리를 내놓아야 했었던 양녕대군 이제(1394~1462)가 국왕을
속이고 불법을 자행한 일이 드러나자 김종서는 양녕대군에게 작록을 회수
하고 도성 출입을 금지시키는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전후 15차례나 상소를
올린다.

화가 난 세종은 "성인의 교훈에 "세번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간다"고
하였으니 그대들도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둘 것이지 어찌 말이 많은가"
하고 꾸짖는다.

김종서가 대간들과 함께 사직하니 세종은 김종서를 전농윤으로 좌천시킨다.

그러나 세종은 다음해인 11년(1429) 9월30일에 김종서를 승정원 우부대언,
즉 우부승지(정3품 당상관)로 승진 발령시켜 좌우에서 가까이 왕을 모시게
하는 은전을 베푼다.

이때 김종서의 나이는 47세, 세종의 나이는 33세였다.

이제 중신의 자리에 올라 국왕과 함께 정책을 의결하는 중임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 12년(1430) 7월10일에는 좌부대언으로 승진하고, 이해 12월8일에는
우대언, 즉 우승지로 승진하는데 우부대언 때 좌부대언을 하던 황보인
(?~1431)도 지신사, 즉 도승지로 승진하여 같이 있게 된다.

그래서 세종13년(1431) 1월25일에는 경연에 참석하여 세종이 "고려사"
편찬의 잘못을 지적하며 태종실록 편찬 후에 이를 개찬할 뜻을 밝히자 이에
적극 동의한다.

그리고 2월20일에는 영평 보장산으로 어가를 모시고 사냥을 나갔다가
진눈깨비 내리는 궂은 날씨를 만나 몰이하던 백성들이 다수 얼어죽는
불상사를 당하는데 이를 적절하게 조치하지 못한 죄로 지신사 황보인이
파면되자 김종서도 2월27일 함께 파면시켜 달라 청하지만 세종은 이를 허락
하지 않는다.

그리고 8월18일에는 세종이 김종서에게 승정원에서 밤낮으로 수직하면서
왕명을 밖에 전달하라는 특명까지 내린다.

그 실록 기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좌대언 김종서에게 전지하여 이르기를, 내가 병이 있고 마침 사신이 온
일을 만나서 번거로운데 환관이 말의 오가는 것을 다 전하지 못하니 심기가
모두 피곤하다. 경은 지금부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밤낮으로 공소에
있으면서 내가 말한 바를 밖에 선전하도록 하라" 여간 신임하지 않고서는
내릴 수 없는 명령이다.

현군 세종으로부터 이런 신임을 얻고 있었으니 김종서의 사람 됨됨이가
어떠했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그러나 김종서에 대한 세종의 이와 같은 총애는 동료들의 시기를 불러
오게도 하였으니 딸 둘을 태종왕자 함녕군 인(?~1467)과 세종왕자 금성대군
유(1426~57)에게 출가시키고 손녀딸 하나는 세종왕자 임영대군 구(1420~69)
에게 출가시켜 왕실과 3겹사돈을 맺어 놓고 있던 병조판서 최사강
(1385~1443)은 어떻게 하든지 김종서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고 병조의 인사
에서 김종서의 천거를 유도하여 인사청탁이라 모함한다.

세종은 이 사실을 간파하고 김종서와 함께 최사강을 의금부에 잡아 가두고
국문하여 실상을 밝혀낸다.

그리고 10월30일에는 그 전날에서야 의금부 옥에서 무혐의로 풀려 나와
승정원으로 출사한 김종서에게 세종은 이렇게 위로한다.

"위에서 신임하여 쓰게 되면 동류들이 그를 미워하게 된다. 예부터 그런
것이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 이 일로 꺾이지 말고 더욱 심기를 가다듬어
예전처럼 공무를 받들도록 하라"

여기서 더욱 감격한 김종서는 이후 여러해 동안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진을 정벌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확정짓는 대공을 세우게 된다.

현군이 양신의 마음과 능력을 믿고 알아주는데 어찌 신명을 바쳐 충성을
다하지 않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