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가 실시된지 3년이 지났다.

실시 초기에 떠돌았던 국가대란설 화폐개혁설 부동산투기의 재현 등 근거
없는 소문은 없는 소문은 낭설로 끝나고 대체로 연착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그런데 최근에 심심찮게 실명제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들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고 있다.

금융실명제의 실시가 신갑오경장적 차원의 역사성으로 인식됐던 위상과
달리 자금의 경제적 위기속에 실명제의 현주소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은행권 내부에서는 실명제시대의 돈세탁 수단으로 "0원통장"이니 "뇌물통장"
이니 하는 신생어가 탄생했는가 하면 보험사들은 실적제고라는 명분하에
허구의 인물까지 동원해 버젓이 가공계약을 체결, 실명제를 마음껏 비웃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에는 일부 특권층이 실명제로부터 국가전체가 피해를
받고 있다면서 보다 논리적으로 한 목소리를 높였다.

금융실명제 실시이후 중소기업의 어음부도율이 과거보다 두배가량 높아졌다
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가뜩이나 제도금융권에 찬밥신세인 중소기업이 동면에 들어간 사채시장
덕분에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실명제가 일반인의 예금 기피및 과소비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얘기로
나왔다.

마땅한 은둔처를 찾지 못한 돈이 우선 "쓰고보자"식의 풍토로 이어지고
과소비와 더불어 사회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우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자금출처를 불문에 붙이는 SOC(사회간접자본) 채권의
발행을 신중히 재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 미비로 경제성장에 큰 장애를
겪고 있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현 경제위기의 극복과 지하자금의 양성화라는 실리를 위해 금융
실명제의 명분정도는 경우에 따라서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금융실명제는 설땅을 잃어가고 있다.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실명제에 대한 대부분의 부정적인 평가가
특권, 부유층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이들 계층이 실명제에 가장 예민해 있는 듯하다.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실명제가 "검은돈, 구린돈"을 찾아내어 자금의 출처를 밝혀내고, 철퇴를
놓거나 세금을 부과하려하니 심기가 편할 리가 없다.

그러니 "나라걱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실명제를
몰아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굳이 서양자본주의의 청교도정신(프로테스탄티즘)을 언급하지 않아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자가 비아냥거림의 대상일 수가 없다.

단지 그 부를 어떻게 형성하고 또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 나라는 과거로부터 청빈은 있어도 청부는 없었던 것 같다.

간혹 신문지상에서 자신이 평생 삵바느질을 해가며 어렵게 모은 전재산을
장학금으로 선뜻 내놓은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접하곤 한다.

이러한 얘기가 비일비재한 서구사회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큰 충격으로
기사화 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자본주의가 많이 왜곡되어 있음을 반증해 주는 대목이다.

머리부분에서 이미 꼬일 데로 꼬인 부의 왜곡된 구조는 핏줄을 타고
온몸에 퍼져 있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과소비의 문제는 일개의 제도적인 탓이라기보다 구조적인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부정부패와도 크게 연계돼 있다고 할수 있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쓰이기 마련이다.

부정부패로 곪아터진 우리사회의 소독제로써 실명제의 확고한 정착은 장지적
으로 과소비를 막을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장치가 될수 있을 것이다.

현 정부에게도 묻고 싶다.

과연 금융실명제의 실시가 그 어느 정권도 못해온 일을 우리만이 해냈다는
한날 화려한 휘장으로만 치장하고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실명제 감독 관련 기관들은 실명제 위반 사례들이 대부분 "잔챙이" 수준이라
제재하기 곤란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냉정함과 객관성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다.

아울러 금융기관의 최고경영자가 직원들로 하여금 실명거래 의무를 준수
하도록 이에 대한 교육과 내부점검을 강화하는 등 각 금융기관의 자체감사
기능을 강화하여야 할 것이며 금융기관 종사자들도 규정대로 실명거래 의무를
준수하겠다는 의식의 전환이 따라야 할 것이다.

또한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고 담보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은
제도금융시장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다소간의 어려움을 겪을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부가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자제시키고 경제력 집중을 완화
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며 우수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비중을 높이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면 해결될수 있는 문제이다.

선거가 다가오면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제바하곤 한다.

이런 시점에서 무기명 장기채권의 발행에 대한 언급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실명제실시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담을 음식은 많은데 담을 그릇이 작으니 당연히 그릇을 키워서 더 많이
담아 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 그릇을 덧붙이고 땜질하여 우선 많이 담고보자는 식이다.

그런데 그 즉석그릇이 오래 갈리 만무하지 않은가.

늘 우리나라의 정책은 발등의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이고 그러다 보니
몇발 앞의 대형화재로 더 큰 화를 자초하곤 했다.

집값이 치솟으니 사상누각의 집이라도 많이 지어 우선 발등의 불부터 끄자는
식으로 신도시를 탄생했으나"졸속공사 부실공사"라는 대형재난을 자초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고비용구조도 급속한 경제성장을 위해 과도하게 처방된
즉석정책의 부작용이라고 할수 있다.

외국의 한 잡지가 한국은 "화려한 성공에 현혹돼 경제원칙을 무시했다"고
지적한 점을 한번쯤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현 상황은 여러가지로 위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위기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면 더 큰 위기의 파고가
모두를 멸망시킨다는 것을 특권 부유층은 직시해야 한다.

정부도 금융실명제가 제2의 탄생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명시"도 과감
했듯이 "운영"도 과감해야만이 실명제 실시에 따른 작은 불편도 감수하고
묵묵히 따라왔던 다수의 건전한 소시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31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