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아, 이제 정신이 드니?"

왕부인이 허리를 굽혀 보옥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 어머니"

보옥의 대답이 분명하자 왕부인과 대부인, 보채, 습인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번졌다.

보옥이 지금이 몇 경쯤 되었는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 상 위에 붉은 등이 밝혀져 있고, 창문에는 맑은 시내 같은 달빛이
촉촉히 흘러내리듯 어려 있었다.

보옥은 자기가 며칠 동안이나 잠이 들어있었는지 가늠을 하기가 힘들었다.

"할머님, 어머님, 밤도 깊었으니 처소로 돌아가시고 보채 누이만 남아
있도록 하시지요"

신방에 신랑과 신부가 단둘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모두들 물러가고 보채만 남았다.

"보채 누이, 내가 얼마 동안이나 잠이 들어 있었어?"

보옥이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보채에게 물었다.

보옥의 이마와 가슴께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보채가 마른 수건을 가져와 보옥의 몸을 닦아주며 대답했다.

"하루 반이 지났어요.

꿈속에서 사람들을 만나는지 진종을 부르고 청문을 부르고 대옥을 부르고
했어요"

대옥이라는 이름을 말할 때는 보채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내가 혼절해 있는 동안 사실은 저승을 다녀왔어.

거기서 죽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대옥 누이도 저승에 있더란 말이야.

보채 누이, 나에게 솔직하게 말해줘.

대옥 누이가 정말 죽은 거야?"

보채의 두 눈에 눈물이 왈칵 고여들었다.

보채도 이미 대옥의 부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

"저승에서 만났다고 하니 거짓말을 할 수도 없군요.

대옥이 이틀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하더군요.

도련님과 제가 혼인식을 치르던 그 시각에 말이에요.

그래서 혼인식에 슬픈 소식을 전하지 않기 위해 하룻밤을 새우고 나서야
이쪽으로 부고를 전했어요.

그것도 희봉 아씨에게만 전했는데, 희봉 아씨가 결국 한나절이 지난 후에
집안 마님들께도 알렸지요.

모두들 소상관으로 달려가서 대옥의 영구 앞에서 곡을 하였지만, 저는
신부가 된 지 사흘도 되지 않은 몸이라 가보지 못하였어요"

보채가 흐느껴 울자 보옥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슬픔을 억누르다가.

"대옥 누이, 대옥 누이!" 하고 부르짖으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보옥이 그렇게 통곡하면 할수록 정신이 맑아지며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