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록 <중소기업연 부원장>

소인은 다를것도 없는 졸한 품성의 소유자들이면서도 서로들 자기가
옳다고 다투지만, 군자는 갈고 닦은 품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이좋게
어울려 지낸다.

전자가 소인의 동이불화요, 후자는 군자의 화이부동이다 .

다른 자끼리와 화합인 이 "화이부동"은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모든 사회는 서로 다른 "개"가 어울려 지내는 "화"의 장이다.

자본주의의 기초인 개인주의도 "화"를 바탕으로 한다.

요즈음 이 화를 핵으로 하는 패러다임이 산업사회에도 등장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지금까지 우리 머리에 깊게 각인된 산업사회의 원형상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삼키며, 한 사람이 져야 다른 사람이 이기고, 한 사람의 손실이
다른 사람의 이득으로 이전되는 다원적인 패러다임(Darwinian paradigm)
이었다.

다윈적 패러다임안에서는 시장안에서 생존하기 위한 기본전략은
"쟁략"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경쟁적 시장기구안에서 협력에 의한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화략)"이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다.

본격적인 화략은 경쟁관계에 있는 대기업들이 손을 잡는 협력전략이다.

우리는 이를 보통 전략적 제휴라고 부르고,미디어는 "적과의 동침"이라고
불러 표현의 멋을 더한다.

대기업간의 전략적 제휴는 원래 다국적기업들이 개발한 전략이지만,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대기업들도 서로 얽히고 설 히는 제휴관계를 맺어서
상호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최근 주목되는 움직임은 중소기업간의 제휴이다.

이를 보통 대기업의 전략적 제휴와 구별하여 중소기업의 네트워크
전략이라고 부른다.

현시점에서 우리 중소기업의 네트워크전략은 공동브랜드 사용,
물류센터공동건립, 공동집배송단지조성, 공장집단화등 "단순 집합"이란
초기형태를 보이고 있다.

중소기업의 네트워크전략은 이태리의 패션업계(의류 가구 신발 등)와
일본의 공장아파트인 "하이테크센터"등에서 만개한 모습을 볼수 있다.

이들이 구축하고 있는 네트워크는 고도로 세분화된 전문적인 중소기업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서 "연결의 경제"를 창출하는 유형이다.

예를들면 밀라노의 섬유패션업계는 R&D기업, 소재생산기업, 염색가공기업,
디자인전문기업, 소품생산기업, 봉제업, 패션정보 분석회사, 패션광고회사
등 전문적으로 세분화된 독립 중소기업들이 연결되어 유기적인 협력시스템을
완성하고 있다.

우리 중소기업의 네트워크 미래상도 이런 유형쪽으로 접근하게 될것이다.

대기업과 대기업간의 협력, 중소기업과 중소기업간의 협력은 활발한
진전을 보이고 있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것으로 보인지만,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관계이다.

통상산업부 공정거래위원회 중소기업청 등 적어도 3개 이상의 부처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바람직한 협력형태를 유도.권고하기 위해 정책적
개입을 하고 있는 것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올바른 협력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기인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에는 왜 바람직한 "화략"이 발전을 못하고 있는가?

가장 큰 원인은 대기업이 "힘의 일방통행"이란 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 있다.

산업 화략(화략)의 기본은 힘에 기초를 두는 "지배모델"이 아니고
상호신뢰와 전문성에 기초하는 "상생(상생)모델"인데, 우리의
하청제도에서는 이 상생의 협력(win-win game)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웃 일본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전통적인 협력시스템인
"케이레쯔(계열)"가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은 대략 이렇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우선 대기업측에서 먼저 감산을 단행,
하청기업에 대한 발주량을 축소함과 동시에 발주처를 선별하기 시작했다.

이에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하청기업들이 서로를 횡적으로 연결하는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대기업의 조치에 전략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중소기업들은 자기들끼리 구축한 이 "동렬(동렬)의 수평적 네트워크"라는
융합을 통하여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을 높임과 동시에 특정한 대기업에
매달리지 않고 다변화된 수주처를 개척하는 "수주독립"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경기가 급격히 냉각되자 대기업이 경기대응용 "쿠션"으로
중소기업을 이용하는 각종 행태들이 벌써 눈에 띄고 있다.

몇몇그룹에서는 이미 발주처를 선별하고 있으며, 가격조건과 지불조건
면에서 하청기업의 불리를 강요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대기업이 어렵다고 해서 협력관계에 있던 중소기업을 걷어차 버려서야
상생에 기초를 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

더욱이 우리의 중소하청기업들은 일본의 중소기업처럼 동렬의 수평적
네트워크라는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대기업의 조처에 대항할 복합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지도 못한 실정이다.

앞서의 중소기업이 대기업과의 관계에서 강도 높은 불이익을 당하면서,
경기후퇴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정책당국은 저성장기에 즈음하여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관계에서
엄정한 심판관의 역할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아울러, 중소기업정책의 3대요소인 육성가능기업에 대한 "보호정책",
대기업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불리시정정책", 구조변화에의 적응을
도와주는 "적응조성정책"등을 실현하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책도구를
개발.실천해야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