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미국의 사회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
박사는 "신뢰(Trust)"라는 최근의 저서에서 신뢰수준과 경제구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 대만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같이 철저한 혈연중심의 사회에서는
가족 이외의 사람들간에 신뢰수준이 매우 낮다.

신뢰수준이 낮은 사회에서는 대기업이 발전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대기업이 발전하려면 소유분산이 필수적이고, 소유분산은 전문
경영체제를 필요로 하는데, 신뢰수준이 낮은 사회에서는 전문경영체제가
정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나라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 한국은 예외적으로 대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이다.

그 이유는 프랑스의 대기업은 대부분이 공기업이기 때문이며, 한국의
경우에는 정부의 차별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가족 중심으로 소유
경영되는 대기업이 생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은행은 일반 대기업에 비해서 단일 지배주주를 일컫는 이른바
"주인"의 존재로 인한 잠재적인 병폐가 근본적으로 클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은행은
소유분산아래서 전문경영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후쿠야마의 이론을 따른다면 우리 나라는 사회 구성원들간에
신뢰수준은 낮지만 소유분산아래서 전문경영체제로 운영되는 대기업을
발전시킨다는 중대한 실험을 은행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실험의 성공 여부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은행통치구조상의
일련의 개혁이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기업통치(Corporate Governance)구조란 기업의 여러 이해관계자들 중에서
자본을 공급하는 투자자와 노동을 제공하는 종업원, 그리고 전문적인 경영의
노하우를 제공하는 경영자간의 책임과 권한 및 의사결정의 구조를 일컫는다.

이러한 기업통치의 메커니즘은 경제적, 법적 제도로서 정치적인 과정을
거쳐서 변화한다.

현재 정부의 주도아래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정책들은 전문경영체제를
전제로 은행통치구조를 개혁하는 노력이라 볼 수 있는데, 은행통치구조의
개혁은 세 가지 방향에서 추진되고 있다.

첫째는 이른바 책임경영체제의 강화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비상임이사
중심의 확대이사회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전문경영인에 의한 책임경영이 가능하도록 경영자에 대한
견제와 감시장치를 마련하는 것인데, 견제와 감시 활동을 수행할 유인이
있는 대주주가 이사회에 참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둘째는 금융기관 구조조정법에 의해서 은행간 인수합병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 법은 비교적 건실한 은행들이 대형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자발적인
합병의 유인을 제고할 뿐만아니라, 예금자를 대리하는 예금보험공사의
주도아래 부실은행을 강제로 합병시키거나 파산시키는 등 은행업에도
시장규율의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셋째는 부실한 피합병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정리해고제 성격의 고용조정
제도를 금융기관 구조조정법에 의해서 도입하는 것이다.

매우 민감한 사안인 이 제도의 도입은 불가피할 것이다.

은행부실의 징후가 농후하고 은행부실의 국가적 피해가 대단히 크기때문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은행의 효율성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행이 혁신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대규모 자금을 신속하게
조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불행하게도 현재로서는 은행 전체로
볼 때 과포화 상태에 있는 점포를 정리하고 과다인력을 감축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용조정의 과정에서 정부의 각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사실 많은 은행이 과다한 인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규제의
산물인 외형위주의 경영과 자율성 상실의 산물인 단기위주의 무책임한
경영이 고도성장기에나 적합한 한국의 전통적인 고용 및 인사관행과
엇물렸기 때문인데, 이 모두 해당 은행의 임직원들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전문경영체계를 전제로 하는 은행통치구조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내용이 보완되어야 한다.

첫째는 대주주가 이사회를 통해서 경영에 참여하는 것과 동시에 이미
논의중 외부감사와 내부감사제도 및 소액주주대표소송제 등 소액주주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장치를 강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은행의 경영진에 대한 견제장치를 도입함과 동시에 경영자가
주인의식을 갖도록 스톡옵션제와 같은 인센티브 장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물론 은행경영의 자율권 보장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정부가
표명하고 이를 철저히 실행하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