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면제도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역사가 오래된
제도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신라 문식왕이 삼국통일을 기념해 670년에 내린 대사령은
가난하여 남에게 곡식을 꾸어먹은 자의 죄까지 면제해준 최대규모였다.

조선왕조에서는 국가나 왕가의 경사,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왕이
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옥에서 풀어주었다.

특히 새 왕은 즉위식에서 요즘의 추임사격인 "교서"를 발표했는데,
교서는 어김없이 사면을 선포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국가나 왕에 대한 반역죄 직계존속 살인구타죄, 독살, 강도죄를 제외한
모든 죄인을 수배중이거나 이미 형이 확정되었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용서한다는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내용이다.

재앙를 막고 음향의 조화를 얻어 선정을 펴려는 국왕의 특권행위였던
왕조시대의 사면은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있어도 자연의 조화가
깨어져 군왕이 덕이 손상된다는 고대 동양사상에서 유래됐다.

그야말로 국민의 "화합"을 중시한데서 나온 제도다.

한국의 사면제도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역사가 오래된
제도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신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기념해 670년에 내린 대사령은
가난하며 남에게 곡식을 꾸어먹은 자의 죄까지 면제해준 최대규모였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왕조시대의 사면은 "은사"라고 불렀을 만큼
왕의 사적특권이 강조된 면이 엿보인다.

한 예를 들면 1418년 태종의 실정을 간하는 상소문을 올렸던 방문중
이라는 젊은 관리는 "임금이 백성의 이익을 박탈한다"는 내용의 일부가
태종의 노염을 사 장1백대를 맞고 진주의 관노가 됐다.

당시 그는 정부의 간행물을 찍어내던 교서감의 교열을 맡은
9품관리였는데, 그가 복권된 것이 세종.문종조를 지나 단종때인 1455년
전주관노로 있을 때였으니 글한번 잘못 쓴죄로 37년동안이나 노예생활을
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동안 수십번의 사면이 있었을 테지만 수많은 동료들이 탄원을 했으나
어느왕 한 사람도 그를 사면복권시키지 않았다.

정부가 광복절을 맞아 집권초에 사정의 본보기로 단죄했던 대형비리사건
관련자 11명을 특사하거나 복권시킨 일로 또한번 여론이 뒤끓고 있다.

특사나 복권의 명분은 역시 "화합"이라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옛날처럼 "은사"의 색채만 짙다.

화해는 진실과의 화해여야 하고 화합도 공동선과의 화합이어야 한다.

집권자의 판단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지도력의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주위에는 그의 판단을 도와주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재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울지못하는 매미"들이었단 말인가.

"상벌이 중도를 잃으면 사시가 순서를 잃는다"는 옛말은 특히 요즘
정치가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