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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50년)를 같은 분야만 고집스레 지킨 이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한국경제 근대사가 짧기도 하지만 금융분야는 근자에야 제모습을
갖추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고상겸 국민생명 고문(73)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금융, 특히 생명보험
쪽에선 선각자다.

일찍이 생명보험업의 국제화와 자율화를 외쳤고 량적인 팽창만을 추구하던
생명보험 업계에 "질"이라는 개념을 불어넣기 시작한 장본인이다.

때마침 한국의 생명보험업이 본격적으로 출범한 것도 반세기다.

엄밀히 말하면 지난 21년에 조선생명이 세워지긴 했지만 남긴 족적이
미미하기 때문에 대한생명이 생기고 생명보험이 보험 본연의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서고부터로 치면 이제서야 반세기다.

그래서 생명보험 전문경영인을 20년간 지낸 고고문이 한발짝 뒤로
물러나던지는 메시지는 의미가 크다.

세상 달라지는 걸 모르고 아직도 외형경쟁에 골몰하는 국내 생명보험은
이제 질적경쟁으로의 환골탈태를 더이상 미루어선 안된다는 게 그의
외침이다.

고고문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해방 이듬해인 46년 대한금융조합(현 농협
중앙회)에 입사, 부회장까지 지냈고 77년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으로
옮겨오면서 생명보험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동방생명과 동아생명
국민생명의 사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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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정만호 경제부장 ]]]

-회갑을 넘기고도 10년이상 최고경영자를 맡으셨는데 일선에서 물러나
뒤에서 보는 느낌은 좀 다르겠지요.

"운이 좋고 건강이 뒷받침되다 보니까 늙어서도 사장을 오래 지냈어요.

뒤에서 보니까 오히려 시각이 넓어지고 큰 흐름이 더 잘보입니다"

-아무래도 잘 하는 것보다는 잘못하는 게 눈에 들어오겠지요.

"그렇지요.

우선은 나 자신부터 "진작에 이랬어야 했는데" 하는 일종의 후회랄까
미련이랄까 하는 게 수시로 생깁니다.

나도 제대로 못했지만 변화에 대응하는 자세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밖으로는 시장이 개방되고 안에서는 소비자들의 인식이 과거엔 경험하지
못한 속도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구각(옛껍질)을
벗어 던진다는 태도가 돼야 합니다.

너무 소모적이고 근시안 적이예요"

-사실 고고문께서 농협(당시 대한금융조합)에 들어가실 땐 금융인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요.

당시엔 농협의 금융기능 자체가 취약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나자신이 농촌(경기 강화)출신이고 일제시대때 농민들이 겪던 어려움을
많이 보아왔기에 농민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되겠다 싶어서 농협을
택했었지요.

농협운동도 아주 초창기 때니까 본격적인 금융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농협이 대단히 큰 금융기관이 돼 있습니다.

그 과정엔 고고문의 역할도 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내 역할은 별로 없습니다.

처음엔 농민들이 땅을 사는 돈이라든지 영농자금을 대주는 일부터
시작됐는데 나중에 일반 여수신과 적금(공제)도 생기고보험(공제)도
취급하게 됐지요.

금융기관으로 치자면 한국에서 유일하게 은행과 보험업을 함께 다루는
가장 점포가 많은 초대형 기관이지요"

-어떤 계기로 보험 쪽으로 옮기게 됐는지요.

"지난 77년2월 농협중앙회 부회장으로 있을 때 당시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을 해 왔어요.

동방생명 부사장을 맡아보라고 해서 생명보험에 전업하게 됐지요"

-그때는 보험시장이 어땠습니까.

"지금과 비교하자면 해선 도약기라고 평가할 수 있지요.

생명보험에 대한 불신이 컸죠.

더욱이 6.25전쟁을 치른 세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서 심리적으로
안보불안이 심했죠.

언제 전쟁이 날 지 모르는 판국에 10~20년짜리 장기성 생명보험에
들라는데 선뜻 수긍하는 사람이 적을 수 밖에 없었지요"

-아직도 생명보험을 사고에 대비한 보장기능 보다는 저축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실정인데 그 당시엔 상당히 어려웠겠습니다.

"보험가입 자체를 권유하는 것보터가 쉽지 않았지만 중도해약 할 경우에
특히 불만이 컸지요.

부득이한 사정으로 계약을 중도해약 했는데 돈을 돌려주지 않거나 원금도
못건지는 수가 많으니까 항의를 할수 밖에 없지요.

은행에 적금든 것과 비교하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요.

그러니까 생명보험의원리 자체를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
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도 동방생명은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결코 작지 않은
회사였는데요.

보험으로 오면서 특별히 구상해놓은 전략이 있었습니까.

"동방생명으로 와서 1년만에 사장이 됐는데, 보험경영을 단기적으로가
아니고 단계적이고 긴 안목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조업에서도 공장을세우고 기계를 설치해도 제대로된 제품이 나오려면
몇년이 걸리는데 사람과 종이만 가지고 하는 인지산업인 보험에서는
10년이나 20년후를 내다보고 플랜을 짜야 한다는 생각이었지요.

선진국의 생보사는 어떻게 하고 있나를 연구하게 된 것도 그래섭니다"

-하긴 고고문을 "국제화 사장"이라고들 합니다.

"동방생명에 오자마자 일본출장을 갔습니다.

생보산업을 보기위해서 1개월간의 일정을 잡았습니다.

일본의 여러 생보사를 찾아다니며 강의를 들었습니다.

당시 미쓰이회장으로부터 내가 사장이 되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사항
11가지를 들었죠.

그중 모집인의 소수정예화와 보험상품을 단기(3~5년)에서 중기(10년)로
개선하라는 충고를 염두에 두고 들어 왔었지요.

한데 우리나라 사정에서는 우선은 적정한 규모의 외형이 갖추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실행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군요.

"아닙니다.

79년과 80년에 동경을 다시 찾았지요.

미쓰이회장에게 당신의조언이 한국에서는 잘 맞지않는 것이라고 말을
했지요.

하지만 그래도 생보사로 발전하려면 그 두가지를 꼭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더군요.

길게 보니까 역시 맞는 말이어서 보험경영을 하면서 줄곧 그 두가지원칙을
충실히 지키려고 애를 썼지요"

-내년이면 국내 보험시장이 전면개방되는데 지금 생보사들의 기법과
경영방식으로는 경쟁에서 쳐진다고들 합니다.

"20년전에 나는 임직원들에게 매일 회의때마다 앞으로 국제화 자율화
정보화시대가 온다는 걸 역설했습니다.

이제는 보험경영도 국제화에 걸맞는 신전략이 필요합니다.

1년만 지나면 계약자의 80%가 해약하고 떨어져 나가는 부실계약은
사업비만 낭비합니다.

상품도 그렇고 경영도 계약을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특히 신설 생보사들은 양적인 성장위주의 경영을 자제하지 않으면
일어서지도 못하고 고꾸라집니다.

신설사들은영업소와 전문설계사를 소수정예조직으로 바꾸고 고객들도
컴퓨터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시급합니다"

-신설사들의 경영여건이 좋지않은 상황에서 대기업들의 생보업진출을
허용해서 경쟁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신규진입을 확대한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기본적으로 보험산업은 은행과 성격이 다릅니다.

"1인은 만인을 위해, 만인을 1인을 위해"를 추구하는 보험업은 사회복지
기능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만성적인 자금부족상태 였기 때문에 늘 현찰을 갖고 있는
생명보험사를 계열사설사로 두면 적자를 내더라도 현찰동원에 큰 도움이
됐지요.

그래서 너도나도 하고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자금의 수급관계가 초과수요에서 초과공급으로바뀌었고 대기업들이
국내에서 간접금융으로 돈을 잘 쓸려고 하지 않아요.

또생보사의 계열사에 대한 투.융자를 까다롭게 제한하고 있기 떼문에
대기업이생보업에 진출하는 메리트가 거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대기업의 진출을 허용한 것은 신규진입 측면에서가
아니라 대형화와 자본충실화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조치라고 봅니다"

-해묵은 문제입니다만 생명보험사를 공개시키는 문제가 골치거립니다.

사주가 얼마안되는 자본금으로 초대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작용이 클 것으로 보이는데 대형사들은 끈질기게 공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생보사의 재산은 계약자의 것입니다.

따라서 이익배당 우선순위도 계약자-직원-주주의 순서가 돼야 합니다.

장사가 잘되면 우선 계약자에게 많은 배당을 해주고 그 다음에 영업을
잘한 직원들에게 후한 봉급을 줘야하겠지요.

맨끝에 있는 주주들은 이익을 맨나중에 나눠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한데 기업공개를 통해 이익을 먼저 보겠다고 나서는 건 이치에 맞지
않지요.

생보사의 기업공개는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대형사와 하위사간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도 우리 생보산업이 안고
있는 큰 숙제증의 하나인데요.

"맞습니다.

우선은 신설 생보사들이 제발로 걸어갈 때까지는 밀어주는 쪽으로
보험정책을 짜야합니다.

획일화된 정책보다 차등화된 시책이 필요합니다"

-요즘들어서 보험에 대한 다른 금융권의 견제가 심합니다.

세제혜택도 줄어들고 있고요.

"보험은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라 사적인 사회보장기능을 갖는 사회보장
체계의 한 축입니다.

금융산업이 고루 발달한 일본에서도 보험업에 대해선 남다른 세제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충실히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세제혜택을 주어서라도 사적보장이
충족되도록 해야지요"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