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여름 어느날 신문을 뒤적이고 있던 심훈(1901~1936)은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의 기사에 빠져 들었다.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온 전과자의 이야기였다.

이 짧막한 기사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기로 한 그는 그날밤을
꼬박새워 단숨에 600커트짜리 대본집필을 끝냈다.

그리고 자기가 감독이 되어 두 달만에 영화 한 편을 완성시켰다.

이 영화가 나운규의 "아리랑"과 함께 한국무성영화시대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꼽히는 심훈의 "먼동이 틀 때"라는 작품이다.

"상록수"의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심훈은 이처럼 한때
영화에도 심취했던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한국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신문에 연재했다.

3편의 시나리오도 썼다.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일본연수에서 배운 이동촬영기법을 도입한
것도 그였다.

훤칠한 키에 굵은 로이드안경테가 잘 어울리는 미남이었던
때문인지 2편에 영화에 직접 출연까지 했다.

이처럼 심훈은 영화인으로도 기억되어야 할 업적을 남겼다.

본명이 심대섭인 심훈은 심상정의 3남1녀중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저항적 기질을 타고난 그는 경성제일고보 3학년때
수학선생과 싸우고 시험때 백지를 제출해 낙제생으로 1년을 유급했다.

3.1독립만세에 참가해 6개월동안을 감옥에서 보냈다.

17세때 귀족가문의 딸이였던 이씨와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안정옥과
재혼하는 등 가정생활도 평탄치만은 않았다.

감옥에서 풀려나 21세때 중국 항주의 지강대학에서 극문학을
공부한뒤 귀국해서는 한때 "극우회"를 만들어 신극운동에 뛰어들었던
일도 있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계에도 여기저기 몸담은 적은 있지만 이 역시
사상이나 기질에 맞지않은 때문이었는지 단기간으로 끝났다.

심훈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만든 뒤 영화가 뜻하는 대로 되지
않자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낙향해 소설집필에 몰두한다.

그러나 신문연재소설 "동방의 애인" "불사조"가 검열에 걸려
연재가 금지되고 시집 "그날이 오면"도 출판이 금지됐다.

이에 굴하지 않고 집필을 계속한 그는 "영원의 미소" "직여성"의
원고료를 받아 집을 짓고 서재를 "필경사"라고 이름지었다.

이 서재에서 1936년 대표작 "상록수"를 써 신문현상공모에 당선한
뒤 다음해 소설의 출판을 위해 서울에 머물다가 장질부사에 걸려
심훈은 36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그의 작품에는 민족주의 사회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저항의식
귀농의지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잇다.

"상록수"를 통해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열었던 심훈은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다.

"우리시골로 내려갑시다.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우리의 고향을 지키러 내려갑시다"

"상록수"에서 박동혁이 채영신을 만나 다짐하던 말이 아마 요즘처럼
피부에 와 닿는 때도 없을 것이다.

8월은 "심훈의 달"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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