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사회는 경제발전에만 치중해온 나머지 의식과 교육문제등의
균형있는 발전을 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온갖 사회병리현상에 진통을 겪고 있다.

겉모양은 파리의 첨단패션과 나란히하지만, 의식은 19세기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간 찌든 생활고에서 좀 배가 불러지니 해외도 다니며 견문을 넓히는
것까지는 좋다.

여기저기 물쓰듯 외화를 낭비하며 사치를 부리고, 무질서.비상식적 행동
으로 마침내는 "어글리 코리언"이란 닉네임을 얻은지 오래다.

내용과 형식의 괴리가 너무 심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고도의 합리적이고 수평적인 사고를 전제하고 있다.

현재 우리경제의 침체는 "모방경제"의 한계에서 온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 원인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들이
잊고 있는 점은 경제를 실행하는 주체들의 "의식구조"이다.

인간은 우선 "의식"을 앞세우고 이에 따른 결과로 "행위"를 생산한다.

일종의 자극과 반응법칙이다.

만약 이 의식이 합리.과학적이고 혹은 논리적으로 실행될때, 그 결과는
당연히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

논리적 혹은 과학적이라는 것은 우선 인과관계를 생각케 한다.

우리경제의 문제점은 결과만을 모방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근본원인 즉,
기초작업을 등한시 함으로써 모방의 한계와 자생력을 키우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직면한 교육적.경제적.사회윤리적문제들은 바로 올바른 의식
구조의 토대가 없이는 해결될수 없다.

따라서 직면한 모든 문제점들을 사실로 인정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우리
자신의 "의식구조"로 환원해 보자.

문제의 실마리를 "너"에게서가 아닌 "나"에게서 우선적으로 찾으려는 의식
을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한다.

그리고 가톨릭의 "내탓이요"이다.

우리의 현재의식구조를 자성적인 태도로 살펴보고 나아가 21세기를 맞이
하는 "선진의식" 혹은 "세계시민의식"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자.

요즘 우리사회는 마치 그 무엇에 의해 출구가 꽉막혀 버린 듯한 답답함을
준다.

정신적피폐에 따른 부도덕성, 폭력과 살인.성폭행 그리고 입시위주의
교육에 따른 어린 학생들의 자살.황금만능에 의한 인간신뢰에 대한 불감증.
정치적 횡포와 비리에 의한 대형참사.정도와 원칙의 결여.기초의 미비함과
합리성의 부재.환경오염의 심각성등 모두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들
이다.

이들 모두의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엔 설득력이 없다.

인간은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려 하면서도 안으로는 자신의 의식속으로
고립하려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자신을 폐쇄시키고 타인과의 울타리를 통해서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용기는 감히 생각할수 없는
일이다.

요즘 어린여학생들의 성폭행피해문제가 연일 매스컴에 보도되고 있다.

신문에서, TV에서 토론프로가 성행한다.

한강다리.삼풍붕괴때 부실공사토론을, 남해의 청정해역에서 기름이 유출
됐을때 환경문제토론을 하며 다시는 그런일이 없을 것 같이 논의했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문제를 나(혹은 국가나 제도)의 문제로 진지하게
의식했다면, 개개인에게나 제도적으로 체감있는 변화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문제를 진지하게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곧 망각해 버리고 만다.

즉 나와 관계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도덕성회복운동에 나서고 있다.

이것 역시 인간의 역동력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마음을 개방하지 않는
무의식한 사람들에겐 쇠귀에 경읽기 꼴이다.

자신의 무의식이나 무관심을 깨고 "너"에게로 의식을 지향해 보자.

이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와의 대화가 가능하다.

무조건 네가 잘못했다고 하는 타성에서 벗어나 너의 문제는 뭐고 나의
문제는 무엇인지 허심탄회하게 얼굴을 맞대고 마음의 문을 열면 실행력있는
대화를 할 수있게 되는 것이다.

과소비가 심하고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침체된다면 그 원인이 나로부터
비롯되고 있다고 자각하자.

바로 이 "의식"이 살아있는 "인간의 역동력"이며 인격이며 도덕이다.

너와 내가 서있는 곳에서 이러한 역동적인 의식이나 태도를 찾게 될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점차적으로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김연웅 < 한양대 강사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