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부 집사들의 우두머리, 즉 총관은 뇌대라는 자가 맡고 있었다.

뇌대의 모친은 보옥의 아버지 가정의 유모였고, 뇌대의 아들 뇌상영은
대부인의 은혜를 입어 어려서부터 밖으로 나가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뇌대가 대부인을 비롯한 영국부 사람들과 지체높은 자들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화원에서 잔치를 벌였다.

뇌대의 화원은 비록 대관원에는 미치지 못하나 연못과 바위 옹달샘
나무 정자 들이 고루 갖춰져 제법 운치를 풍기고 있었다.

여자들은 주로 화원을 거닐며 놀았고, 남자들은 대청에 차려진 술자리를
중심으로 호탕하게 떠들며 놀았다.

술자리에는 가진과 가련 가용 설반 등등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들 중에는 뇌대의 아들 뇌상영이 특별히 초대한 유상련이라는 자가
있었다.

유상련은 원래 권문세가의 자제였지만 어릴 적에 부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글공부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오히려 무술에 능하게 되었다.

특히 창검을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게다가 피리도 잘 불고 거문고도 잘 탔다.

한때는 도박에 빠져 패가망신을 할 뻔도 하였다.

무엇보다 미녀 뺨치는 아름다운 얼굴에다가 몸매가 유연하고 수려하여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남자들마저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반은 이전에 유상련을 한번 보고 사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오늘 이렇게 뇌대의 집 대청마루 술자리에서 만나게 되니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설반은 술잔을 들고 슬그머니 유상련의 옆으로 가 앉았다.

"상련이, 이거 오랜만이군. 신수가 더 훤해졌어"

설반이 술기운으로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유상련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입을 헤 벌렸다.

생겨도 너무도 잘 생겼어.

설반의 얼굴에는 감탄의 기색이 역력하였다.

"신수가 훤해지다니요.

요즈음 사는 게 말이 아닙니다.

허허"

유상련이 좀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또 도박을 해서 가산을 탕진했는지도 몰랐다.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지. 기운을 내라구"

그러면서 설반이 유상련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다른 사람이 볼때는 남자가 남자를 격려해주기 위해 잡는 손으로
여겨졌겠지만, 설반의 속셈은 다른데 있었다.

유상련도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설반의 손을 받아주었으나 설반의
다른 손이 슬그머니 허벅지로 뻗어오는 것을 보고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