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선 < 연세대 교수/경제학 >

금년도 하반기 경제운용계획이 논란 속에 발표되었다.

이 계획은 비록 오늘날 한국경제의 어려움이 총체적 위기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구조적 문제가 확대되어 지속적인 성장이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인식하에 수립되었다.

정부의 이러한 상황인식은 일단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하에서 만들어진 정부의 여러 정책들이 국민들에게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정부의 정책이 신뢰성을 갖지 못하고 국민들에게 미래의 우리 경제에 대해
자신감을 주지 못하는 지금 정부가 택해야 할 정책 방향은 무엇인가?

우선 이번에 발표된 정부의 경제운용계획을 통해 우리는 정부가 이제는
경제를 조절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을 별로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지금의 성장률이 7%대를 웃돌고 있으며, 물가상승률도 5% 이하로
유지될 것이라고 낙관하면서 가장 문제시한 것이 연초에 예상한 것보다
두 배로 증가할 것으로 보이는 국제수지적자였다.

그러나 막상 이 국제수지적자를 단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정책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수출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킬 수도 없고 또 수입을 강제로 감소시킬 수도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야 과소비하지 말라는 애국심에 기댄 호소 뿐이
아닌가?

그런대로 자신 있다는 물가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상황을 보아가면서 기껏해야 금년도에는 공공요금
을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 물가대책의 전부가 아닌가?

물론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정부가 무능함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자는 것 뿐이다.

정부가 쓸수 있는 수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마치 모든 일을 할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잘못이며 그런 잘못은 후에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

예컨대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휘발유값을 미국 다음으로 싸게 유지하고
있는 탓에 석유의 소비가 많아 교통의 혼잡, 공기의 오염, 국제수지의 악화
등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시경제적 성과를 위해 정부가 할수 있는 일이 별반 없는 지금 정부는
이제 과거와 같이 경제적 성과에 매달리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억지로 수출을 부추겨 성장률을 1~2% 올리는 일이나 물가 수치를 강제로
얽어매는 일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님을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민간으로 하여금 경제야말로 민간 자율에 의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할 필요가 있다.

오랜 기간 정부주도적 경제운용에 익숙해져버린 민간부문이 무슨 문제이든
정부에 의존해보려는 습성을 전환시키기 위해서라도 정부는 스스로 할수
있는 것과 할수 없는 것을 국민들에게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부는 이제 성과보다는 공정한
규칙을 세우고 되도록 국민 모두가 혜택을 얻게되는 사업에만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다시 정부가 우리 경제의 근본 문제를 고비용.저효율로
규정한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고금리 고임금 고물류비용이 우리경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전적으로 옳은 지적이며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한 우리 경제의
미래는 밝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의 이러한 고비용.저효율의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이는 바로 정부가 경제를 운용하는 규칙을 공정하고도 효율적으로 세우지
못했으며 국민 모두가 혜택을 보게 되는 사회간접자본의 건설과 같은 일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경제정책, 혹은 산업정책이 경쟁과 협동을 촉진하는
객관적 규칙에 의거하기보다는 일부 부문이나 계층에 특별한 혜택을
부여하거나 반대로 일부 부문을 억제하는 식의 성과위주적 정책으로
일관되어 왔음을 부인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정책은 우리 경제의 신축성을 크게 저해하여 고비용의 경제구조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임금은 무작정 올라만 가는 것이며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비효율적 산업이나 기업을 정리하기가 어려우며 재벌이 비효율적 기업을
지속적으로 끼고 있으며, 또 온갖 규제에 의해 형성된 기득권을 관련
민간부문은 물론 정부에서도 비호하고 있는 오늘의 실정이 바로 고비용.
저효율을 야기하고 있다고 하겠다.

민주화와 더불어 각 기득권층의 횡포는 오히려 더 격화되고 있으니
경제적 효율성은 증진될수 없는 실정이다.

이제 정부가 할 일은 분명하다.

보다 과감하게 공정한 규칙을 설정하고 비효율적 규제에 의해 형성된
기득권을 정리함으로써 시장원리에 의거하여 경제가 신축적으로 조정되어
가게 해야 한다.

정부가 지닌 자원은 되도록 국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사회간접자본에
투입함으로써 물류비용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