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미명, 바람 없는 잔잔한 호숫가,
미동도 없이 수면을 가르는 정제된 시선, 마치 정지된 시간속에 갇혀
버린 듯 숨결조차 고요하고 새벽마저 억만겁 저멀리로 줄달음친다.

문득 투명한 수면 위에 파문이 일고,목석같던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움직임을 낚아채자 한척을 넘는 은회색 잉어 한마리가 허공으로 날아
오른다.

그러자, 영겁의 침묵을 깨뜨리는 환호성과 호들갑스런 대화가 새벽
하늘을 깨운다.

어느 사이엔가 날이 밝으면 온 밤을 침묵과 씨름하던 반딧불같던
초롱한 눈빛이 스러지고 태양빛에 온몸을 드러낸다.

89년 12월, 회사 창립과 거의 때를 같이해 태동한 국조회는 숨가쁘게
이어지는 경쟁의 연속선에서 잠시 헤어나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인내하고
용서할수 있는 예스런 멋을 배워보자는 뜻에 따라 낚시광 몇명이 의기투합,
모임을 조직한 것이 어느덧 여섯해를 넘어섰고 회원수도 50여명을
육박하고 있다.

무념무상의 자연속에서 맞는 첫 새벽의 신선한 감흥을 즐기는
국조회원들은 낚시보다는 차라리 요산요수한다는 성인군자의 도량을
연마하기에 여념이 없다.

잠시 업무를 뒤로하고, 출조전야 낚시도구 하나하나를 매만지며
조행준비를 하노라면 마음은 한발 앞서 수면위 가득한 물안개 사이로
스민다.

구불구불 시골길을 따라 꿈속에서 만난 듯한 나지막한 산굽이를
따라 돌면 산세와 어우러진 천연덕스런 자태의 물길이 펼쳐진다.

어느 누구라도 감정의 여운없이는 그 자연스런 자연을 마주 대할수
없으리라.

지난달엔 몇번을 찾아 헤맨끝에 안성천 상류 창내리 낚시터엘
다녀왔다.

이곳 잉어는 워낙 힘이 세 낚싯대를 차에다 걸어놓아야 한다는
문현식 과장의 허풍은 그렇다치더라도 입질이 시작되면 자동차로
끌어당기면서 핸들의 떨림으로 "손맛"을 느껴야 한다는 박태걸국 장의
황당하기 그지없는 농담이 오가는 사이 새벽 4시10분, 낚싯대는 드리워지고
깊은 적막속에 회원들의 눈빛만 초롱초롱 빛을 발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날의 낚시 결과는 한마디로 꽝, 4시30분께
낚은 쓸모없는 꾸꾸리 한마리가 전부였다.

그러나 회원들중 어느 누구도 이날의 결과를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 어떤 고기보다 좋은 훈훈한 인정을 낚았으니까.

언제부턴가 국조회에 하나의 불문율이 생겼다.

포인트가 어떻고 입질이 어떠하며 누가 언제 몇마리를 잡았는지 결코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듭되는 조행을 통해 때를 기다릴줄 아는 지혜를 배우고 때가 아니면
일단 포기하고 마음을 추스르는 유유자적의 여유를 배운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