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단오선물은 부채요 동지선물은 책력"이란 말이 있다.

단오가 되면 곧 여름철이므로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선사하고 동지땐
곧 새해가 되므로 새해 책력을 선물한다는 풍속을 이른 말이다.

이 풍습은 산업사회가 되면서 책력은 연말에 달력을 선물하는 형태로
변형.유지되고 있지만 부채는 선풍기 에어컨등에 밀려 우리생활주변에서
모습을 찾기 힘들게됐다.

그러나 부채란 반드시 여름철에 바람을 일커내 더위를 식히는데만 사용된
도구는 아니었다.

신랑이 신부를 맞기 위해 장가 가는 날, 백마에서 내려 신부집 문을
들어설 때 얼굴의 하반부를 가리는 파란 부채나 신북 초례청에 나올 때
수모가 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빨간 부채는 신랑 신부가 처녀 총각이라는
동정을 표상하는 방식이었다.

또 부채는 사의 기능이 있다고 믿어서 단오에 부채를 선물하면 염병을
쫓는다는 의미로 온선이라 불렀다.

무당이 굿을 하면서 부채를 듣고 춤을 추는 것도 부채가 잡귀를 내쫓고
신을 불러들인다는 무속적 행위였다.

그 뿐 아니라 우리나라 부채는 국교품으로서 일찍 사절편에 중국 일본
몽골등지에 진출했었다.

유지향의 현연편엔 조선국 사절이 접부채를 명나라 태조에다 받쳤는데
그가 이를 좋아해 향방에게 명하여 이를 모방 제작케 하고 철선 또는
고려선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밖에도 "고려사" "고려도경" "조선왕조실록" "열하일기" "지봉유설"
등 여러 문헌에 이 같은 기록이 보인다.

한편 부채가 축재 또는 뇌물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아주 사치로운
부채도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조 성종 24년 10월, 대사헌 허침이 사치를 경계하는 상주문중에서
"부채값이 무명 8~9동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무명 1동이 50필이므로 무명 400~450필에 해당하는 고가의 부채가 있었던
것을 알수 있다.

최근 우리 부채를 찾는 젊은 남녀나 외국인 여행객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한다.

기본적으론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증대"가 우리 부채를 찾는
원인이겠지만 실용적 측면에서도 에어컨을 켠 상태에서 부채질을 하면
공기순환이 빨라져 더 시원하고 승용차 안에선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도
쓰인다는 설명이다.

우리문화 상징의 하나인 부채가 신세대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그밖에도 우리 조상의 얼과 멋이 담긴 문물들이 신세대의 감각으로
새롭게 개발되기를 개대해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