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야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서구식 결혼식을 올린
사람은 유길준의 아우인 유성준이었다고 한다.

그 해가 1907년 이었다.

그러나 전통유학자로서 개화기 인사들의 행태를 사소한 일까지 예리하게
비판한 매천황현도 그 결혼식에서 하객들의 축의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다.

물론 당시로서는 당당했던 가문의 결혼식이었으니, 친지들은 사전에
상당한 부조를 했을 것은 거의 틀림없다.

이 결혼식은 좀 특별한 경우겠지만 기록에 남겨져 있는 그 무렵 촌락의
결혼풍습을 보면 결혼식은 그야말로 "마을잔치"였음을 알게 된다.

혼례일이 정해지면 이웃의 부녀자들은 그 집에 가서 부엌일 등을 거들며
잔치를 준비했다.

이때 이웃에서는 부조를 했는데 술이나 떡 국수, 그리고 신혼살림에
필요한 물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웃이 상을 당해도 역시 마을사람들이 함께 달려들어 위로하고 도우며
상사를 거뜬히 치러냈다.

이런 상호부조의 풍속은 씨족공동체사회이래 어느시대 어느사회를
막론하고 꾸준히 이어져 온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호부조의 상징이었던 일종의 교환노동인 "품앗이"나
공동노동조직인 "두레",촌락협동의 상징인 "계"는 그 본래의 모습을
잃은채 거의 소멸돼 가고 있다.

"품앗이"는 집단적 임금노동의 형식인 "품앗이고지"로 둔갑했고 "경운
기품앗이" "트럭터품앗이" "이양기품앗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계"도 경제적이식과 오락 친목이 목적이 돼 버렸다.

이런 현상은 사회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우리의 전통적 상호부조정신가운데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부조"뿐이다.

관행화 돼 우리가 "예절"로 여기고 있는 "경조사부조"에도 문제가 있다.

"가진 돈이 없으면 망건 꼴이 나쁘다"는 말도 있지만 부조금도 빼놓지
않고 많이 내야만 외양까지 훤하게 보이는 것인지 그래야만 직성이 풀린다.

일종의 허영심이라 해야할 "체면"을 "예절"로 잘못알고 있는 셈이다.

예절이란 본래 존경 감사 친애등 어떤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형식인데
이 마음가짐의 내용은 사라지고 그것을 담았던 형식만이 남아 있는 꼴이다.

인천시 교육청이 국장 3만원, 과장 2만원, 계장이하 1만원 등 경조사
부조금의 상한선을 만들어 지켜가기로 했다고 한다.

제대로 지켜질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우리의 경조사문화도 바꾸어져야
할 때가 왔다.

"부조는 않더라도 젯상은 치지말라"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5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