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21세기 세계의 선두주자가 되려면 하루속히 옛섬유강국에서
신흥패션대국으로 변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이철우 마담포라대표(64) 55년 광주에서 양장점을 시작한 뒤 70년대말
아무도 눈돌리지 않은 마담사이즈의 기성복화에 성공, 국내의 대포적
중소패션기업인 (주)마담포라를 키워낸 의지의 패션디자이너이자
우수경영인이다.

"사랑을 담은 날개를 만들어 여성들의 삶, 나아가 사회를 보다
아름답고 풍성하게 이끈다"는 것이 40여년간 한길을 걸어온 그의 패션과
경영철학.

나이에 관계없이 패션연구소와 교육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사회복지법인
"사랑의 날개"를 통해 장애자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기술을 가르치는 등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에 앞장서고 있는 이대표를 서울 논현동
마담포라사옥에서 만나 패션디자이너와 경영자로서의 일생과 포부를
들어봤다.

======================================================================

[[ 대담 = 박성희 문화부장 ]]

-70년대에 부인복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발, 패션계에서 입지를
굳히셨죠.

일찌기 아무도 생각지 못한 분야에 눈돌린 것이나 여성으로서 규모가
작은 맞춤복점에서 기성복메이커로의 변신에 성공한 것 모두 놀랍습니다.

계기와 비결이 있었는지요.

<>이대표 = 마흔이 넘으니 나 자신 자꾸 몸이 나요.

단골고객도 마찬가지고.

네이비블루 등 시원한 색상을 써서 날씬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니
다들 좋아하더군요.

전문직여성클럽 (BPW) 전국대회에 앞서 몇몇 회원들의 옷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기대이상으로 좋았습니다.

용기를 내 조선호텔에서 제1회 이철우 생활의상발표회를 열었죠.

코미디언 최용순씨와 강부자씨가 모델이었는데 최용순씨가 마담포라
때문에 바지정장을 처음 입어봤다며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명동시절 얘기죠.

70년대초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기도 만만찮았을 텐데요.

처음부터 명동에서 시작하셨는지.

<>이대표 = 언제고 서울 패션계에 진출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던중 71년에 광주 충장로 대화재로 가게를 잃었죠.

빈손으로 올라와 명보극장 뒤 근화빌딩에 조그만 의상실을 차렸는데
문옥현 선배가 운영중이던 포라미용실을 맡겨 함께 꾸리다가 3개월만에
미용실은 그만두고 명동으로 옮겨 포라의상연구실을 열었습니다.

마담포라로 이름을 바꾼 건 78년이고.

-본격적인 기성복사업은 롯데백화점에 입점하면서부터죠.

<>이대표 = 생활의상발표회라는 이름으로 연 빅사이즈패션쇼 반응이
좋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롯데백화점 관계자가 찾아와 개관때부터
부인복코너를 맡아달라는 거에요.

백화점 문 열기 2년반 전이었죠.

우리 고객과 일본백화점 부인복코너의 사이즈를 비교해 체계화했어요.

사이즈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죠.

3년정도 준비했는데 백화점 문을 열자 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기초가 단단해야 한다는 걸 확인했지요.

-소기업의 경우 규모가 커지면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은데요.

고비는 없었는지. 외국진출 포부도 있었을텐데.

<>이대표 = 매장수가 늘어나고 직원의 수도 많아지면서 힘들었습니다.

"적은 이익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잠언구절을 경영이념으로 삼은 덕에 고비를 넘길 수 있었죠.

지금도 무리한 선투자를 줄여 재고부담을 덜고 고객만족을 위해
세일을 지양함으로써 매장 증가로 인한 상대적 불이익을 커버합니다.

89년 미국 워싱톤에 진출했다가 실패했어요.

외국시장에 진출하려면 기획과 디자인 자본 인력면에서 충분하고
그곳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데 잘 안맞았던 거지요.

-현재 매장은 얼마나 됩니까.

새로 생긴 백화점에서는 제일 먼저 마담포라를 입점시키려 한다죠.
연매출은.

<>이대표 = 마담포라가 53개, 꼼뻬땅이 17개로 전국에 모두 70개입니다.

미국LA에도 있고. 매장이 많아지면 이익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객이 어디서나 우리옷을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여건이 되면 새 매장을 개설합니다.

95년 매출액은 150억, 올해 목표는 200억원입니다.

-마담포라는 백화점 매장중 매출이 가장 큰 브랜드로 유명한데요.

요즘도 그런지 궁금합니다.

<>이대표 = 빅사이즈존에서는 여전하죠.

다만 여성들이 체형이나 나이로 옷을 입지 않고 마인드로 입는 경우가
늘어나 컨셉과 디자인을 대폭 수정했습니다.

체형커버에만 촛점을 맞추지 않고 유행과 멋을 강조하고.

그랬더니 마담포라 옷이 굉장히 젊어졌다고들 합니다.

-빅사이즈 옷을 패셔너블하게 만들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이대표 = 목과 가슴부문에 중점을 두고 칼라나 주머니 등 디테일한
부분에 신경씁니다.

옷이란 무엇보다 입었을 때 쾌적해야 하는 만큼 억지로 디자인을
변형시키기보다 디테일에 관심을 두고 전체 실루엣을 조절합니다.

-패션연구소 설립을 준비중이시죠.

<>이대표 = 내년초 포라패션연구소의 문을 엽니다.

마담포라와 꼼뻬땅의 디자인개발은 물론 실버에이지와 장애인을
위한 의상디자인 등 현재 국내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는 부분을 연구토록
할 계획이에요.

-장애인을 위한 패션이란 무엇입니까.

입고 벗기에 편안한 옷을 만들자는 건가요.

70년대에 빅사이즈기성복을 만든 것이상으로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생각됩니다.

계기가 있다면.

<>이대표 = 그것도 있지만 장애인도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시간 장소
경우에 따라 패션을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데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미스 일본 출신의 장애자가 펴낸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몸만 불편하다는 것뿐이지 마음과 정신은 정상인과 똑같은 만큼
기분에 따라 옷은 물론 휠체어까지 장식, 주위의 분위기를 이끈다는
내용에 감동했습니다.

우리 장애자들도 멋과 패션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연구소가 가동되면 필요한 요소를 개발토록 하고 사업은 사랑의날개에서
맡도록 할 생각입니다.

-현재 주브랜드인 마담포라외에 20~30대를 대상으로 한 하이캐주얼
브랜드 꼼뻬땅을 내놓고 계시죠.

내년부터 "오토퀴튀르이철우"라는 새 브랜드를 하나 더 런칭한다던데.

<>이대표 = 나이에 관계없이 자기만의 스타일과 가치를 중시하는 층을
대상으로 맞춤복 스타일의 옷을 만들고자 합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의생활의 다양성이 뚜렷해진 데다 한복에
의존했던 관혼상제 의상을 대체할 품목이 필요해졌습니다.

약혼복 연주복 등 분위기를 살릴 옷이 있어야죠.

새 브랜드를 내놓는다는 것이 쉽지 않아 준비기간이 길었는데 내년초엔
선보일 겁니다.

-패션사업에 바쁜 가운데서도 사회복지법인 "사랑의 날개"를 설립,
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기술연수를 시키고 계시는데.

장애인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까닭이라도.

<>이대표 = 어렸을 때 바로 옆집에 앉지도 못하는 장애아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눈물로 지새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돕고 싶었죠.

가깝게는 고객중 30세가 되도록 방안에서 지내는 중증장애인딸을 둔
분이 있어 함께 고통을 나누는 모임을 구성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계로 시작해서 어머니장학회가 됐던 것을 92년 3억원을 출연해
사회복지법인 "사랑의날개"로 출범시켰습니다.

-누군가 돕는다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은 현실에서 장애인복지사업은
특히 어려울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대표 = 마담포라가 1년에 한번씩 빅세일을 해서 그 수익금을
내놓는 만큼 장학금문제는 큰 어려움이 없는데 솔직히 기술연수는
마음같지 않습니다.

막상 열심히 배우려는 사람이 적은가 하면 힘들다며 무조건 도와주기만을
바라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도 기술연수에 힘을 기울이는 이유는.

장애인을 고용하는데도 앞장서고 계시죠.

<>이대표 = 고기를 그냥 주는 것보다 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장애인을 돕는다고 말했다면 앞으로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일한다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수결과가 좋은 장애인은 직원으로 채용합니다.

현재 10여명 있는데 더 늘려야지요.

-광주에서 남성양장점을 연지 41년째죠.

패션인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적은 언제였는지.

<>이대표 =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전환한 뒤 많은사람들이 기뻐할
때였죠.

뚱뚱해서 고민하던 고객이 마담포라의 원피스를 입고 파티에 자신있게
갔었다며 들뜬 목소리로 전화했을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첫패션쇼를 했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고.

언젠가 패션쇼를 열겠다던 꿈이 현실이 됐었으니까요.

-혹 아쉬움이 있다면.

앞으로의 계획과 후진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은.

<>이대표 = 패션시장 개방으로 수입품이 늘어나면서 기술인력이 줄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대로 가면 멀지 않아 패션쪽의 고급인력은 바닥이 날 겁니다.

정상인과 장애인 모두에게 패션기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설립, 고급기술인력을 양성하려 합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돈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혼이 담긴
옷을 창조한다는 각오로 인내와 긍지 성실성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즐겁고 기쁘고 신나게 자기 일을 하면 언젠가 그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패션사업과 장애인돕기 모두를 해낼 수 있는 비결은.

<>이대표 = 믿음의 힘입니다.

84년 논현동 본사사옥 신축후 잃었던 건강을 되찾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 믿습니다.

나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