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서 칼을 들고 자기 목을 찌르려고 하다가 사람들에게 제지당한
평아는 이환에게 이끌려 대관원으로 들어갔다.

평아가 계속 흐느끼고 있자 보채와 습인 들이 평아를 위로하려고
애를 썼다.

"희봉 아씨가 술이 좀 과해서 그랬을 거야. 평소에는 얼마나 잘
대해주느냐 말이야"

"마님만 나를 때린 것이 아니에요.

주인 어르신도 나를 마구 때렸어요"

"그야 부끄러운 현장이 들켜서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평아 너만 떳떳하면 되는 거야. 꾹 참으라구"

하긴 따지고 보면 평아 역시 떳떳한 편은 아니었다.

희봉이 영국부 전체 살림을 돌보느라고 바삐 돌아다닐 때 가련이
틈 나는 대로 평아를 서재로 불러들여 애무하며 방사를 치르곤 했던
것이었다.

그러면 가련은 아까 포이의 아내에게 달콤하게 속삭인 것처럼
평아에게도 귀가 솔깃해지는 말들을 늘어놓지 않았던가.

하지만 평아는 어디까지나 가련하고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어야만 하였다.

"내가 참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나요.

마님이 오해를 푸시고 나를 받아준다면 다시 열심히 섬겨드려야겠죠"

평아는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울음을 그쳤다.

"평아야, 이홍원으로 안 가볼래? 보옥 도련님도 너를 보면 반가워할
거야"

습인이 평아를 데리고 이홍원으로 오자 오늘 가련이 일으킨 소동에
대해 듣고 있던 보옥이 평아를 붙들고 자초지종을 더욱 캐어물었다.

보옥으로서는 포이 아내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였다.

또 한번 소동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하였다.

웬만큼 평아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난 보옥은 평아를 위로하기 위해
습인을 시켜 새옷을 내와 입히기도 하고 고급 분과 연지를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평아가 분을 받아 손바닥에 문질러보니 그 촉감이 여간 부드럽지가
않고 얼굴에 바르니 골고루 잘 퍼졌다.

"어머, 이 분은 무엇으로 만들었길래 이렇게 고울까?"

"그건 납가루로 만든 보통 분이 아니고 자말리화 꽃씨를 빻아 향료를
섞어 만든 고급품이야.

평아가 그 분을 바르니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전혀 딴사람이 된 것
같애.

그런 얼굴로 희봉 형수에게 가면 희봉 형수 마음이 저절로 녹아 평아
너를 더욱 아껴줄 거야"

보옥은 자말리화 꽃처럼 훤하게 피어난 평아의 얼굴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며, 여자는 역시 화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