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보면 정조는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않아
허술한 건물의 좁은 방을 거처로 삼았다고 한다.

용포 외에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명주이불도 덮지 않았다.

식사 때는 반찬이 서너가지를 넘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도 접시에
많이 담지 못하게 했다.

간혹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한미한 선비같은 이런 생활을 거두도록
권하면 "검박을 숭상함은 재물을 아낌이 아니라 복을 기르는 도리"라고
했다는 것을 보면 정조는 현주로서 지켜야 할 "검박의 도리"를 몸소
실천했던 인물임이 확인된다.

예부터 우리나라의 음식은 종류가 다양하다.

그 이유는 4계절이 뚜렷해 절후마다 색다른 음식이 따로 있는데다가
고을마다 독특한 지역음식이 발달한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분석이다.

전국 각지의 특성 있는 대표적 음식이 모두 올랐던 궁궐의 잔칫상이나
제사상 차림에는 이런 음식의 다양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고종때 기록에 따르면 동궁 (뒤에 순종)의 결혼 잔칫상에 오른 음식은
대략 50여가지나 된다.

또 1891년 전해에 돌아간 조대비생신날 다례상에는 무려 80종의 음식이
올랐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상풍하속"이란 말이 있듯이 궁중의 풍속은 그대로 백성들의 풍속이
되게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궁중음식 풍속을 본받은 것이 오늘날 우리 음식풍속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성 싶다.

하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먹고 남은 음식찌꺼기는 그대로 수챗구멍에다
버렸다.

19세기말 우리나라에 네차례나 다녀간 영국의 비솝여사는 바로 이
수챗구멍에 버린 음식찌꺼기가 썩어가는 냄새를 맡고 "베이징을 보기전
까지는 서울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도시로 생각했다"고
기행문에 솔직하게 적어놓았다.

그러나 당시는 음식물 찌꺼기가 오늘날처럼 환경문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국방부가 최근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대책의 하나로 군사병 급식량을
10%정도 줄이는 대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에 앞장서야 할 사람들은 주부들이다.

여협의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서울의 각 가정에서 버리는 주간
쓰레기의 32%가 음식물 쓰레기라고 한다.

또 40대 이하의 젊은 주부일수록 음식물 쓰레기를 더 많이 버린다는
결과도 나왔다.

요즘 주부들이 "음식을 아끼는 것은 복을 기르는 도리"임을 모르는
탓이 아닐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