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휘 대만총통이 20일 취임해 초대민선 총통으로서의 임기를 시작했다.

그는 성실하고 청렴한 임품과 온건한 개혁성향으로 장경국 총통에 의해
부총통으로 발탁됐었고 88년 장총통이 타계하자 잔여임기를 마친뒤 90년
3월에 국민대회에서 총통에 재추대됐었다.

이총통이 총통으로 취임했을때 각국은 국민당정권의 40년 대만통치사에서
처음으로 본토출신이 아닌 대만출신이 총통이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었다.

또 그가 지난 3월23일 대만 정치사상 처음으로 복수정당 경합아래 54%의
지지로 직선총통에 당선됐을때 대만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일로 각광을
받았었다.

이총통은 23년 태북현 삼지향의 농촌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북고등학교시절 간트와 괴테에 심취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는 일본 교토제대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했으나 2차대전의 종전으로
국립대만대학을 졸업하게 됐다.

그후 미아이오와대를 거쳐 68년에 코넬대학에서 "농업과 공업간의
자본이동"이란 논문으로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논문으로 그해 전미농업경제학분야의 최우수논문상을 받았다.

그는 귀국후 국립대만대와 정치대에서 교수가 됐으나 72년에 50세의
최연소 행정원정무위원으로 입각해서 학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뒤 타이베이시장(78년)대만성 주석(81년) 등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제8대 총통으로 취임한 그의 앞길은 평탄할것 같지만은 않았다.

내정에 있어선 입법원 164석중 국민당이 불과 그석차이로 과반수를 유지
하고있기 때문에 정부가 야당의 연합공세에 끌려 다니지 않기위해선
화고한 대야소를 만들어야 할 정치적 부담이 있다.

또 외치에 있어선 작년 6월의 이총통 방미로 악화된 양안관계를 개선해야
할 입장에 있다.

이총통은 취임사에서 "필요하다면 대륙을 방문해 강 민주석과 만나
양안문제를 직접 논의할 준비가 돼있다"고 중국측에 적극적인 정치적
공세를 폈다.

하지만 그의 정상회담 제의가 쉽게 실현될 가능성은 작을것 같다.

그의 "분리주의행보"에 극도로 의구심을 가져온 중국지도부가 그의
노선전환이 명확치 않는한 회담에 응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총통의 이번 취임으로 양안관계등 대만의 대내외정책이 획기적으로
변화될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합리적이고 신축성 있는 사고가 어떻게 대만현안들을 타개해
나갈런지 주목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