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머니나, 난 가장 도련님인 줄 알았네"

영관은 보옥을 가장인 줄 알고 그렇게 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기를 애무해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영관은 언젠가 비가 쏟아지는 날 장미밭에서 비녀로
땅바닥에 장자를 쓰고 또 쓰고 하던 그 아리따운 여자가 아닌가.

그때도 그 여자와 가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였는데
과연 그 짐작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가장이 아니라서 실망했나? 그렇다고 노래를 불러달라는 내 청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난 목이 쉬어서 못 불러요.

요즈음 연극 공연에 출연도 잘 하지 않고 있는걸요"

보옥이 들어볼 때는 영관의 목소리가 그리 심하게 쉰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관이 워낙 쌀쌀맞게 대꾸하므로 더 이상 부탁을 하고 싶지가
않아 보옥은 곧장 영관의 방을 나와버렸다.

"영관이 뭐라 그래요? 노래를 안 부르겠대요?"

보관과 옥관이 보옥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목이 쉬었대. 그까짓 노래 안 들으면 어때"

보옥이 부루통한 얼굴로 이향원을 나가려고 하는데 보관과 옥관이
보옥의 소매를 붙잡았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가장 도련님이 돌아와 영관이더러 노래를 하라고 하면 할 거예요.

영관이 고집이 세긴 하지만 가장 도련님 말은 잘 듣거든요.

아니, 가장 도련님이 벌써 오시네"

보옥이 대문 쪽을 바라보니 가장이 오른손에 새장을 하나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가장은 보옥을 보자 슬쩍 새장을 뒤로 감추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 새를 사오네. 거, 새 이름이 뭐야?"

보옥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가장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고
새장으로만 시선을 보내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

"옥정금두라는 새예요.

재주 많은 새예요.

연극 공연에 써먹을까 하고요.

여기서 잠깜만 기다리세요"

가장은 보옥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급히 영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보옥은 슬그머니 호기심이 생겨 영관의 방으로 가까이 다가가
문발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가장이 영관에게 새장을 내미는 태도로 보아 선물용으로 그것을 사온
모양이었다.

영관은 새장을 받아들고는 가장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둘은 새장을 방 복판에 놓고는 함께 새장을 들여다보며 새를 희롱하였다.

그러면서 가장이 팔을 뻗어 영관의 어깨를 정답게 감싸는 것이 아닌가.

영관은 온몸이 사르르 녹는듯 머리를 가장의 가슴에 묻고, 가장의 손이
영관의 은밀한 부분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는 보옥이 숨을 몰아쉬며 얼른
문발에서 물러나 보관과 옥관이 있는 데로 돌아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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