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국제질서의 규칙을 정한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시아인들은 자신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후퇴도 있을 것이고, 마찰.실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는 동아시아인들이 주도하는 ''아시아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점 만은 분명하다"

미국의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최근 한글판으로도 출간된 ''메가트렌드
아시아''(한국경제신문사 간)에서 이렇게 전망했다.

아시아를 주제로 한 그의 책이 출간된 직후인 요즘 중국과 대만간의
''양안 분쟁''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동아시아인의 또다른 핵심 국가인
한국은 총선 정국에 휘말려들고 있다.

''한경 독서대학'' 강의를 위해 내한한 나이스비트를 본사 양봉진 국제부장이
서울 호텔 롯데 컨퍼런스 룸에서 만나 중국 등 아시아국가들의 정세 변화와
향후 전망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봤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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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부장 =중국과 대만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귀하의 저서 "메가트렌드 아시아"가 출간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양국간 긴장 국면이 언제 어떤 식으로 해결될 것 같습니까.

<> 나이스비트 =중국과 대만은 경제적으로 따로 떼어놓기 어려운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번 긴장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은 중국으로서나 대만으로서나
원치 않는 일일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나온 통계만 봐도 대만은 중국에 270억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해
놓고 있습니다.

비공식적인 추정에 따르면 이 수치는 500억달러로까지 높아집니다. 또
작년에는 400만명 이상의 대만인들이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이런 몇가지 통계만 보더라도 중국이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긴장국면을 오래 끌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 양부장 =귀하의 저서에서도 지적돼 있듯이 중국은 외국, 특히 대만을
중심으로 한 화교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삼스레 중국이 대만과의 관계를 긴장쪽으로 몰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 나이스비트 =대만의 독립운동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또 중국-대만 문제에 깊게 개입하고 있는 미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도
깔고 있는 것 같고요.

어느 경우건 "대국"으로서의 위신을 살림과 동시에 미국과 대만을 다함께
겨냥한 단순 시위용의 성격이 짙다고 봅니다.

작년 11월 중국 상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중국통일위원회 의장을 겸하고
있는 상해시장과 장시간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과 대만 간의 문제 해결에 군사적인 수단을 동원할 생각이
없다"고 강조하더군요.

<> 양부장 =중국은 이번 "양안 사태"에 쏠리고 있는 각국의 비난에 대해
"어디까지나 중국 내부의 일"라며 서방국들의 참견을 오히려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까.

<> 나이스비트 =글쎄요. 중국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글로벌 시대에는 설령 어떤 특정 국가의 내부 문제라고 해도
사안에 따라서는 지구촌 전체에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보스니아 사태가 그렇습니다. 세르비아쪽에서는 보스니아 침공에
대해 "내부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같은 얘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각국이 통합되고 있는 시대에 중국과
대만은 모두 상당한 중요성을 갖고 있는 나라들입니다. 서방국가들이
관심과 우려를 표시하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 양부장 =중국은 대만관계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1국2체제"원칙을
표명해 왔습니다.

이같은 중국의 정책 기조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 나이스비트 =그렇지 않아도 작년 11월 상해시장을 만났을 때 "1국
2체제" 원칙에 대해 의견을 나눈 바 있습니다.

그때 상해시장은 "정확하게 설명하면 우리가 지향하는 건 "1국2체제"를
넘어선 "1문화다체제( One Culture,Many Systems )"이다"라고 말하더군요.

중국 사람들은 어느 민족보다도 현실적이니만큼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기존의 현실적 접근노선을 바꿀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 양부장 =화제를 일본쪽으로 돌리지요.

귀하는 저서에서 "현재의 아시아는 일본 주도에서 중국 주도로 상황이
바뀌고 있다"며 "일본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본의 장래를 여전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나이스비트 =일본은 정치 경제 양면에서 모두 실질적인 위기(virtual
crisis)를 맞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일본은 국내총생산(GDP)이 최근 5년 연속 정체기를 맞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10개 신흥공업국은 연평균 7~10%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과시하고 있지요.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은 3년 연속 12%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일본의 부진이 더 두드러져 보이게끔 돼 있지요.

아시아 역내에서 일본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이 축소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그동안 일본이 확고하게 다져놓은 입지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장기적 추세로 볼 때 일본이 하강 국면에 접어든 것만은
틀림없다고 봅니다.

<> 양부장 =그렇지만 일본의 최근 경제지표를 보면 회복세가 뚜렷합니다.

일본의 운이 다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속단이 아닐까요.

<> 나이스비트 =일본이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태에서 회복될 가능성까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과거 오일쇼크 엔고 등의 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한 전례가 있지요.

그러나 이번의 경우도 그같은 저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를 쉽게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좀 더 두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 양부장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이 그동안 고도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던 데는 일본경제 발전모델을
벤치마킹한 덕분도 적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는데.

<> 나이스비트 =한국은 요즘 일본이 겪고 있는 구조적 위기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겁니다.

사실 한국경제 역시 일본에 못지 않게 가분수적인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곤란합니다.

단적인 예로 한국경제는 지나치리만큼 대기업그룹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10대 대기업그룹의 생산액이 한국경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같은 대기업 경제지배 체제는 일본에서 밖에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면 7조달러에 이르는 미국경제를 한번 예로 들어봅시다.

포천지 선정 500대기업의 총 생산액은 미국 전체의 10%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이나 일본과는 아주 대조적이지요.

미국경제는 압도적으로 중소기업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은 기업가 정신을 중시하고 경제력집중
배제를 추구하는 새로운 경제단계로 진입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 양부장 =귀하는 특히 일본에 대해 "진정한 아시아의 일원이 되려면
서방강대국들의 사랑방인 G7에서 탈퇴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 나이스비트 =그렇습니다. G7은 어디까지나 서방국가들의 클럽일
뿐입니다.

일본이 G7에 끼어든 건 그들이 "탈아입구"에 성공했음을 과시하는
성과물로서의 의미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일본이 G7에서 빠져
나오는 건 "탈구입아"로 회귀할 준비가 돼 있음을 아시아국가들에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일본의 리더들이 이 사실을 모를리는 없습니다.

남은 것은 "결단" 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사람들은 아직도 "서구적인 것"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양부장 =그렇다면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OECD역시 서방선진국들로 구성돼
있기는 마찬가지인데요.

더구나 한국은 OECD 가입을 위해 자본시장을 조기 개방해야 하는 등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

<> 나이스비트 =OECD 또한 "신사들의 모임"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의미를
크게 갖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한국의 OECD 가입이 그런 "배타적 모임"의 회원이 됐다는 자긍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실질을 도외시한 채 체면만을 내세운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양부장 =귀하는 여러 저서를 통해 재래의 대형 장치산업에 대한
중요성은 뒤로 한 채 소규모의 첨단 소프트산업에 대한 청사진만을
나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정말로 "작은 것은 강력하다(Small is powerful)"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 전통적인 산업에서는 분명 "규모의
경제"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 나이스비트 =정확히 말한다면 "작은 것은 때로 강력하다"고 하는 게
옳습니다. 분명 "규모의 경제" 또한 존재합니다. 자동차 조선 등 기존
산업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지속될 게 틀림없고요.

그러나 소규모 산업이 점차 중요성을 높여나가고 있는 것 만은 분명
합니다. 기업들이 조직을 소규모 단위로 재편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 소프트같은 회사는 소규모 팀제를 통해 현재와 같은
강력한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 양부장 =귀하는 저서에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아시아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U(유럽연합)를 창출해 낸 유럽인들의 "유럽주의"를 염두에 둔 것 같은데
과연 "아시아주의"란 게 실체가 있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 나이스비트 =물론 유럽에서처럼 농익은 지역공동체 이념으로서의
"아시아주의"가 확립돼 있다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아시아인들이 자신들만의 동질성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주의"가 모색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제 영국인 친구가 "유럽의 젊은이들은 60년대에 처음으로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이라고 자신을 밝히지 않고 유럽인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요즘 아시아에서도 이런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저에게 자신을 "아시아인"이라고 소개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양부장 =그러나 아시아국가들은 유럽과 달리 민족 언어 문화 종교 등의
편차가 아주 큽니다.

동일한 지역공동체 이념으로 결속되기에는 장애요인들이 많다고 봅니다만.

<> 나이스비트 =그점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아시아주의"는 결코 완성된 개념일 수 없습니다.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 단계 개념이라고나 할까요.

더군다나 대부분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럽 등으로부터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지 40~50년 밖에 안되는 신생국가들입니다. 내부 정돈부터가
아직 완전히 안 돼있는 상태이지요.

따라서 지역공동체로서의 아시아주의가 완성되려면 좀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봅니다.


<> 양부장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같은 경우는 EU에 대응할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로서 "EAEC"를 결성할 것을 주창하고 있습니다만.

<> 나이스비트 =경제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여건이 무르익었다고
봅니다.

아시아국가들은 지난해 처음으로 역내 교역비중이 역외 무역을
앞질렀습니다.

이제는 아시아국가들간의 긴밀한 경제협력 장치를 제도화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만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EAEC 구상을 실현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동질성이 강하고 경제력이 엇비슷한 유럽국가간에 완전한 공동시장을
결성하는 일도 아직껏 난항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 양부장 =귀하는 21세기를 규정지을 열가지 메가트렌드로 문화 예술의
르네상스 등을 꼽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하이테크의 상징이었던 로봇이
밀려나고 인력이 산업의 주역으로 재등장하는 추세가 고개들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일본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지요. 도요타자동차는 최근 로봇을 줄이고
종업원들을 추가 투입하는 생산시스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일본의 땅값이 워낙 비싸다보니 로봇이 차지하는 공간을 아껴야 한다는
판단도 작용했다고 합니다만.

<> 나이스비트 =매우 흥미로운 관찰이군요.

하이테크란 것은 필연적으로 휴머니즘과 반대 방향에 서있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기술이 무한하게 발전하다 보면 휴머니즘을 되찾으려는 움직임 역시
강력해질 수 있겠지요.

하이테크와 휴머니즘 사이에서 얼마나 최적의 접점을 찾아내느냐 하는
것이 인류의 새로운 과제일 것입니다.

< 정리 = 이학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