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영은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고는 곧장 일어났다.

"아버님에게 급한 용무가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왔군요.

이거 죄송합니다.

오자 마자 가게 되어서"

풍자영은 아무래도 설반에게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어 왔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잘못 찾아왔다 싶어 그냥 빨리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왕 오신 김에 술잔이라도 함께 나눕시다"

보옥과 정일홍 들이 풍자영의 소매를 잡자 풍자영은 할수 없이 다시
앉았다.

"여러분과 사귀어온 지 몇 년이 되는데 내가 언제 까닭 없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까.

술을 꼭 마셔야 된다면 내 두 잔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풍자영이 술잔을 내밀자 설반이 술주전자를 들고 두 잔을 연거푸
부어주었다.

풍자영이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방을 나가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다음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하여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는 사낭터의 일도 그때 상세히 말씀드리지요"

사람들이 초대 날짜를 정확하게 대라고 다그치자 풍자영이 늦으면
열흘, 빠르면 여드레 안으로 초대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말을 타고
급히 물러갔다.

대옥은 보옥이 아버지에게 불려 가서 종일 돌아오지 않으므로 걱정이
되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홍원으로 와 보았다.

이홍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보채가 앞서 이홍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보채도 보옥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온 것일까.

대옥은 마음에 시기심이 확 일어 걸음을 빨리 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홍원 대문을 두드리니 시녀들이 대문을 열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안쪽에서 소리만 보내왔다.

"다들 주무시고 계시니까 볼일이 있으면 내일 오세요"

목소리를 들으니 청문이었다.

"나야, 나"

대옥은 평소에 청문과 친하게 지내는 터라 자기가 대문을 두드렸다는
것을 알면 설마 열어주겠지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청문은 한술 더 떠서 대답했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나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도련님이 명령하였어요"

그럼 보채는 어떻게 들어갔단 말인가.

대옥은 설움에 북받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안에서는 보옥과 보채가 서로 크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