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은 손님들고 함께 주안상에 앉아 음식과 술을 먹으려고 하니
보옥은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난 아직 생일 선물도 주지 않았는데 이렇게 대접부터 받아서 어떡하지?"

"내일이라도 선물을 보내면 되지 뭐.

오늘은 부담없이 마음껏 마시라구. 허허허"

설반이 보옥의 술잔에 술을 부어주며 호탕하게 웃었다.

"난 어떤 걸 선물할까?

돈이나 먹고 입는 물건으로 한다면 할머니나 어머니에게서 타내야
하니까 결국 내 것이 아닌 셈이지.

내 정성이 들어있는 선물을 하려면 내가 직접 그리고 쓴 그림이나
글씨로 하는 수밖에 없지"

"그것도 그럴싸한 생각이군.

경황의 춘화 같은 그림이면 더욱 좋고"

설반이 어느 집에서 본 그 춘화에 대해 장황하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설반은 그림의 예술성을 두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감질나게 하는 묘하게 음탕한 부분을 가지고 그러는 것이었다.

"여자가 막 바지를 벗는 장면인데 말이지, 허연 엉덩이가 살짝 드러나
있는 모습이 사람 죽여주더군.

남자는 이미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워 여자의 그런 모습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고 말이야"

보옥은 춘화를 그려서 선물해 달라고 부추기고 있는 설반이 은근히
미워졌다.

그래서 슬쩍 시비를 걸었다.

"고금의 서화를 다 보아도 경황이라는 화가의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어.

명나라 화가인 당인을 경황으로 잘못 읽은 거겠지"

"맞아. 경황이 아니라 당인일 거야"

다른 사람들도 보옥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설반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짐짓 큰소리를 쳤다.

"아무려면 어때. 경황이든 당인이든 과인이든 그림만 좋으면 됐지"

그때 하인이 들어와 풍씨댁 도련님이 왔다고 설반에게 아뢰었다.

풍씨댁 도련님이라면 신무장군 풍당의 아들 풍자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마침 잘 오셨군. 들어오시라고 그래라"

풍자영이 풍채 좋은 몸을 건들거리며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와
너털웃음을 웃어가면서 방 안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풍자영의 얼굴에 퍼렇게 멍이 들어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그 상처의 연유를 물으니 풍자영은 철망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풍자영은 다음 기회에
말하겠다면서 거기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