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신혜정씨(28)는 지난해말 5년간 몸담았던 은행
을 그만뒀다.

그녀가 결혼하고도 "꿋꿋이" 다니던 직장을 퇴직한 이유는 육아문제 때문
이었다.

결혼 2년만에 얻은 아들을 돌봐 줄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던 것.

시집과 친정이 모두 부산인 신씨는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봐줄
형편이 못됐다.

그렇다고 자신의 한달 봉급을 고스란히 쏟아부어야 하는 탁아모 고용은
엄두가 안났다.

동네에 놀이방이 있긴 했지만 돌이 지나지 않은 영아라는 이유로 받아주질
않았다.

어쩔수 없이 그녀는 "직장"대신 "아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인이냐, 엄마냐."

직업을 가진 기혼여성들이 한번쯤은 꼭 맞부닥치게 되는 선택의 기로다.

여자로서 결혼과 육아를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직장을 버릴 수도 없는게
기혼 직장여성들의 고민이다.

육아야말로 일터로 향하는 여성들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족쇄이자
걸림돌이란 얘기다.

통계청이 3년마다 실시하는 "고용구조 조사보고서"(93년판)를 보자.

취업의사는 있지만 일자리를 찾지 않고 있는 이른바 여성 잠재실업자중
58.9%가 가사및 육아를 구직포기 이유로 들었다.

특히 25~39세 연령층의 여성들중에선 이 비율이 75%에 달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최근 서울지역 50인이상 사업장에 근무하는 기혼남녀
7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육아실태 설문조사" 결과도 여성들의 애로를
여실히 드러낸다.

자녀양육 문제로 배우자나 자신의 이직.사직을 고려해본 사람이 조사대상의
64.8%.

실제 사표를 냈던 경험을 가진 사람도 13.5%에 달했다.

대부분의 기혼 여성들이 직장생활과 육아문제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들어 "탁아 이사"나 "주말 엄마"가 속출하는 신풍속도도 이런 이유
에서다.

작년초 일산 신도시 아파트에 입주했다가 육아때문에 1년도 못채우고
처가 근처인 서울 목동으로 이사온 강남국씨(33)의 말은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케 한다.

"맞벌이인 저희 부부는 아이를 갖는 순간 솔직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내에게 직장을 포기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를 돌봐줄 곳을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고.. 정말 처음엔 난감하더군요. 결국 결혼후 3년만에
당첨된 아파트를 전세주고 처가 근처로 옮길 수밖에 없었죠. 아이를 가졌다
고 마냥 기뻐할 수 만도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습니다"

강씨의 케이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아이를 맡아줄 부모나 친척이 지방에 사는 경우는 더욱 애처롭다.

지방에 아이를 두고 주말에 하루정도만 부모 노릇을 할수 있는 "주말 부모"
가 되기 십상이다.

사태가 이 정도면 맞벌이 부부의 육아는 "가족 문제"가 아니다.

"사회문제"로 받아들일만 하다.

맞벌이 부부들이 육아문제로 겪는 어려움은 "여성고용 인프라"의 미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다름아닌 보육시설의 절대 부족이다.

작년말 현재 전국의 탁아소는 놀이방 3,844개소를 포함해 모두 9,805개소.

여기서 수용할 수 있는 아이들은 29만여명에 불과하다.

"맞벌이 부부가 100만쌍을 넘는걸 감안하면 한 부부당 자녀 한명씩만
따져도 70만명이상은 개인탁아등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볼수 있다"는게
노동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그도 그럴게 "영육아 보육법"이 여성근로자를 300명이상 고용하고 있는
사업장은 탁아소를 반드시 설치토록 하고 있으나 의무대상 324개 사업장중
탁아시설을 갖춘 곳은 17개에 그치고 있다.

육아휴직제도가 사문화된 것도 마찬가지다.

남녀고용평등법은 1년미만의 영아가 있는 여성근로자는 1년간 육아휴직을
쓸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법조문으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여직원은 결혼하면 으레 퇴직시키는 "결혼퇴직제"가 관행화된 한국 기업의
현실에서 육아휴직을 기대하는건 너무 순진한 일"(K산업 노조 여성부장)
인지도 모른다.

문제의 핵심이 분명한만큼 해결책은 명확하다.

"무엇보다 탁아소수를 크게 늘려야 한다. 가장 적은 투자로 보육시설을
확충할 수 있는 방법은 동네마다 있는 초등학교에 병설 탁아소를 설치하는
것이다. 기존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데다 급식문제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어서다. 초등학교 병설 탁아소는 육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지름길이다"(정양희 여성민우회 사무국장)

여기에 육아휴직제도를 탁아시설이 채울 수 없는 틈새를 메우는 방안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돌 이전의 영아는 현실적으로 탁아소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만큼 이를 육아
휴직제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기업주의 인식변화가 선행과제이다.

물론 출산휴가나 육아휴직등 소위 "모성보호 비용"을 여성을 고용한
기업들에만 부담지우는건 더 큰 문제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기업들의 여성고용 기피를 부채질 할 수 있어서다.

탁아시설 확충등에 정부가 발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육아는 단지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을 재생산"
하는 "인프라"란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와 "직장"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한국 여성들의 불행이기 이전에 국가 전체의 비극임에 틀림없다.

< 차병석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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