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붐이 가속화되고 있다.

뮤지컬 팬이 늘어나면서 극단마다 뮤지컬 공연에 앞장서는가 하면
해외 유명뮤지컬 수입이나 대형뮤지컬 제작에 대한 대기업의 지원도
급증하고 있다.

뮤지컬 연출자이자 극작가인 박만규씨 (60.예그린단장)는 국내 뮤지컬
극단의 효시인 예그린 창단때부터 뮤지컬 제작에 참여해온 국내 창작
뮤지컬계의 산 증인.

서울시립 가무단장과 85년 남북공연예술단 우리측 총감독 등을 거치면서
철저하고 완벽한 연습제일주의를 강조, "무대위의 히틀러"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를 만나 국내 뮤지컬의 역사와 발전방안등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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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그린악단이 처음 창단된게 60년대 초반이었죠.

창단 당시엔 기획을 맡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박단장 = 62년 작곡가 김생려, 연극연출가 이원경, 음악평론가
박용구선생 등 초호화 멤버가 모여 만들었습니다.

초대단장은 박용구 선생께서 맡고.

"예그린"이라는 이름은 "옛것을 그리는"을 줄인 말로 오화섭 선생이
지었고요.

"어제(옛것)를 그리워하며 내일을 향한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창단규모가 상당했죠. 처음부터 뮤지컬단체를 표방했습니까.

당시엔 뮤지컬이라는 용어가 생소했을 듯한데.

<> 박단장 = 악단과 합창단 무용단원이 각80명에 연기자와 스태프까지
더하면 3백명이 넘었습니다.

재계인사 30명이 후원회를 구성해 지원했죠.

창단 초기엔 뮤지컬이라기보다 종합공연물을 지향했지요.

음악과 무용, 문학의 종합무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콩쥐팥쥐" "한여름밤의꿈" 등을 각색해서 올렸지요.

뮤지컬단체로 방향을 굳힌 것은 67년부터고.

박용구선생께서 한국적 뮤지컬의 창작과 중흥을 내걸고 우리고전
1백여편을 검토한 결과 "배비장전"을 선정했어요.


-"살짜기 옵서예"가 바로 그 작품이죠.

연초 "애랑과 배비장"이라는 제목으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려져
역시 상당한 인기를 모았습니다.

<> 박단장 = 최창규씨가 작곡했는데 1년이상 걸렸어요.

아마 요즘 뮤지컬 1편 만들면서 음악에만 1년이상 시간을 쏟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그 결과 "살짜기 옵서예" 등 불후의 명곡이 탄생됐지요.

어쩌면 예술에 대한 사랑은 그 시절에 더 컸던 것같기도 하고.

연습도 1년이상 했습니다.


-70년대초까지 예그린이 국가적인 행사도 많이 맡았죠.

그러다 70년대중반이후 활동이 뜸해왔는데.

<> 박단장 = 국공립 예술단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됐을 때 북측대표단 환영행사도 예그린이
담당했습니다.

창단이후 7차례나 이합집산을 거듭했어요.

뮤지컬단체는 인원과 비용이 워낙 많이 필요해 운영이 쉽지 않습니다.

국립 예그린가무단이 됐다가 서울시립가무단이 생기면서 대부분의
단원이 그리로 흡수됐죠.


-서울시립가무단 시절의 활약은 지금도 국내 공연예술계 전체에
회자되고 있는데.

<> 박단장 = 초대단장은 김희조선생이었고 허규선생이 잠시 맡았다가
최창권선생을 거쳐 84년부터 91년까지 제가 맡았지요.

맡고 보니 1년예산이라는게 소극장공연 1회밖에 할수 없는 액수예요.

서울시에 가서 시민세금으로 운영하는 단체가 시민을 위한 공연을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설득해 본래예산의 10배를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시립무용단 합창단 등 세종문화회관 산하단체가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공연을 할수 있었지요.

그렇게 해서 "양반전" "성춘향" "바다를 내품에" "나는야 호랑나비"
등을 올렸습니다.


-서울시립 가무단장 재임시 평양에도 가고 미국과 일본에서도 공연
하셨죠.

남북예술단 교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 박단장 = 85년 50명을 선발, 평양에서 "2000년대를 향하여"라는
주제로 공연했어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데다가 극본을 쓰고 악보를 볼줄 아는 연출가
라고 해서 70~80년대 내내 웬만한 국가행사를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구설수에도 올랐고.

87년 "양반전"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졌는데 학교강당같은 곳이
아니고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극장 등 좋은 공연장에서 했어요.

"양반전"은 그래서 지금도 영역본이 있습니다.

영어자막을 설치했었거든요.


-외국 공연이라는게 지금도 어렵지만 당시엔 정말 큰 일이었을 텐데요.

더욱이 가무단처럼 규모가 큰 단체가 뮤지컬의 본고장 미국에서 순회
공연을 갖기 위해서는 용기와 함께 적잖은 비용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박단장 = 86년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미국 공연을 기획했어요.

뮤지컬의 본바닥에서 우리 뮤지컬의 주소를 확인하고 싶었지요.

전 LA올림픽 조직위원회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뉴욕과 워싱턴 시카고
등 10개도시 순회공연을 결정지었습니다.

현지답사차 갈 때 비용이 모자라 집사람이 들어둔 적금을 해약했지요.

막상 순회공연을 나설 때도 집사람이 노후에 원예농장을 운영하겠다고
붓던 적금을 해약, 송두리째 들고 갔어요.

정해진 예산만으로는 소주 쫑파티나마 하기 어려웠거든요.


-뮤지컬 극본뿐만 아니고 무용과 연극등 공연예술 전장르의 극본을
쓰셨죠. 방송극본도 엄청나구요.

전공은 미술이었는데 희곡은 언제부터 쓰셨나요.

<> 박단장 = 63년 국립극단의 장막희곡공모에 "해풍"이 당선돼 등단
했어요.

바다를 주제로 한 최초의 희곡이라고들 하지요.

후에 소설가 천승세씨가 "만선"을 썼습니다.

그뒤 무용극 "심청" 발레"처용" 창극 "안중근" 오페라 "왕자호동" 등
전장르의 극본을 맡았죠.

연출만 했으면 식구들 밥 굶겼을 거예요.

작품 준비도중 돈이 모자라면 집에서 내다쓰는 일이 다반사였으니까요.

서울시립가무단장 시절엔 극본 쓰는 일이 부업이었어요.

방송극본도 그래서 많아졌고. 덕분에 겨우 자식들 공부시켰지요.


-연극 등 무대용어를 우리말로 고치는 작업에 앞장서기도 하셨죠.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같은데.

<> 박단장 = 박정희역으로 유명한 이진수씨와 60년대에 계간 연극지를
만들었어요.

그때 연극계용어가 대부분 일본어인 걸 알고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했습니다.


-요즘 뮤지컬붐이 한창인데요.

하지만 한편에선 뮤지컬을 너무 쉽게 여기고 아무나 할수 있는 것으로
안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TV탤런트 등을 동원한 한탕식 공연도 적잖고. 선생님의 경우 무대의
히틀러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철저한 연습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 박단장 = 뮤지컬배우는 최소한 3년의 훈련기간이 필요합니다.

말이 뮤지컬배우지 음악과 연기 무용을 모두 잘할 수 있는 배우가
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주위에서 하도 추천해 주역으로 기용한 여배우가 연기와 노래를
모두 못해 혼이난 적이 있습니다.

노래는 무대뒤에서 대신 해줄수도 있지만 연기는 그럴수도 없고.

그 다음부터는 절대 아무나 캐스팅하지 않았어요.

타고난 재질에 피나는 노력이 더해져야 좋은 뮤지컬배우가 될수
있습니다.


-"살짜기 옵서예"가 최근 "애랑과 배비장"이라는 이름으로 리바이벌돼
선풍을 일으켰는데.

사실 유명하다는 외국뮤지컬을 보면 우리 정서와는 안맞는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결국 유리 뮤지컬의 수준이 떨어지는게 아니라 마땅한 작품이 없어서
외국작품을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요.

<> 박단장 = "살짜기 옵서예"는 최창권선생이 1년이상 걸려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20년동안 세번이나 개작했어요.

음악이 뛰어날 수밖에 없지요.

우리 고전을 바탕으로 한 만큼 그속에는 순대국처럼 구수한 우리의
체취가 담겨있어요.

뮤지컬을 성공시키려면 첫째는 작품이 좋아야 하고 둘째는 그야말로
전심전력을 다해 연습해야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스타를 키워야 합니다.


-30년이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뮤지컬스타가 탄생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 박단장 = 공연기간이 너무 짧아요.

길어야 1주일에서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타가 만들어지기는
어렵지요.

기껏 몇억원씩 들여 만들어 1주일 공연하고 끝내니 그런 낭비가 없지요.

무대세트나 의상도 그렇고.

외국처럼 작품 1편을 몇달, 심지어 몇년씩 공연하면 작품도 제대로
완성되고 스타도 생기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지요.


-장기공연을 못하는 건 공연장 부족때문인가요.

유명탤런트를 기용한 작품의 경우 탤런트의 방송일정 때문에 지방순회
공연을 못한다는 얘기도 있던데.

<> 박단장 = 예전엔 공연장 부족이 첫째였지요.

70년대까지만 해도 무대막이 있는 공연장 찾기가 어려웠을 정도니까요.

지금은 지방마다 문화회관이 생겨 형편이 훨씬 나아졌지요.

그보다는 오히려 공연할 작품이 없는게 문제지요.

문화회관이 늘었어도 문화예술공간이 아닌 집회장소로들 쓰잖아요.


-지난해 정부로부터 문화예술부문 공로상을 받으셨는데.

앞으로의 계획과 소망은.

<> 박단장 = 지금 말한 것처럼 예전과 달리 공연장은 늘었는데 운영할
사람과 올릴 작품이 없어요.

실은 오래전부터 공연예술부문 전문인력 양성소및 공연장을 갖춘
컨벤션센터를 설립하고자 준비했어요.

경기도 용인에 3천5백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400석규모 극장과 강의실,
숙박 가능한 연수시설을 세우기 위해 건축허가까지 받아놓았는데 공사비가
없어 착공을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등산로와 13만평 규모의 용덕저수지도 있어 위치는 그만입니다.

뜻있는 기업인이 나서 연수원겸 공연장을 건립하면 좋겠습니다.

임직원 및 가족은 물론 일반인을 위한 워크숍도 열고 공연도 하구요.


-건물만 짓는다고 연수나 공연이 가능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구체적인 운영프로그램을 갖고 계신가요.

<> 박단장 = 교육과 연수를 담당할 강사진을 짜놓았습니다.

공연에 참가할 스태프와 배우진도 준비돼 있고.

"모이자" 한마디면 출발할 수 있습니다.


-연전에 일간지에 "뮤지컬반세기"라는 제목으로 국내뮤지컬에 얽힌
얘기를 연재하셨죠.

<> 박단장 = 연재중 미처 쓰지 못한 내용을 첨가해 연말께 "한국
뮤지컬백서"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할 작정이에요.

사진자료 중심의 책도 낼 계획입니다.

자료가 많은 만큼 컨벤션센터가 생기면 한쪽에 뮤지컬도서관내지
박물관도 만들고 싶습니다.

( 박단장은 충남 논산 태생으로 서울대 미대 조각과를 졸업했으며
예그린 창단멤버, 72년 남북적십자회담 환영공연 총감독, 85년 남북공연
예술단 우리측 총감독, 88올림픽 문화예술축전작 "즐거운 한국인" 연출,
93대전엑스포 "한국의날" 구성총감독 등을 담당했다.

"꽃님이 꽃님이" "바다를 내품에" "달빛나그네" "시집가는날" "양반전"
"나는야 호랑나비" 등 30여편이상의 뮤지컬극본을 발표했다)

< 대담 = 박성희 문화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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