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 거기 놓아두었던 책 위에 또 복사꽃
꽃잎들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책뿐만 아니라 그 주변이 모두 복사꽃 꽃잎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저 꽃잎들을 어떻게 한다지.

보옥이 조금 전처럼 꽃잎들을 옷자락에 담아 물에 버릴 것인가, 그냥
털어내 버릴 것인가 망설이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보옥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대옥이었다.

보옥은 복사꽃 꽃잎들이 덮고 있는 책 쪽을 흘끗 쳐다보며, 꽃잎들
때문에 책을 숨길 수 있었군,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옥 누이야말로 이 한적한 곳까지 와서 뭘하는 거야?"

"보면 몰라요? 여기 갈퀴하고 빗자루, 비단 주머니도 있어요"

아닌게 아니라 대옥은 비단 주머니가 달린 갈퀴를 어깨에 메고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모르겠는데. 비단 주머니는 왜 갈퀴에 매달았나?"

보옥은 정말 대옥이 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꽃 청소를 하려고 온 거예요.

이 갈퀴와 빗자루로 꽃들을 쓸어서 이 비단주머니에 담는 거죠.

어머, 여기도 복사꽃 꽃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있네"

그렇게 말하는 대옥이야말로 한 떨리 꽃과도 같았다.

저 뽀얀 꽃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나.

"비단 주머니에 담아서 그 다음 어떡하려고? 난 심방갑으로 흘러내려
가는 물에다 뿌렸는데"

"물에다 뿌리면 더러워져요"

물이 더러워진다는 말인지 꽃잎들이 더러워진다는 말인지 얼른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여기 물은 깨끗하지만 내려갈수록 사람들이 더러운 것을 마구 버려
더럽잖아요.

그 더러운 물에 꽃잎들이 더러워지는 것이 안쓰러워요"

보옥이 꽃잎들을 털어버리려고 하다가 발에 밟히는 것이 안쓰럽게
여겨져 물에다 버렸는데, 대옥은 한 수 더 떠서 꽃잎들이 물에 더러워지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럼 꽃잎들을 어떻게 버리지?"

"이 비단 주머니에 담아서 흙무덤에 묻어주면 썩더라도 깨끗하게
썩겠지요"

꽃잎들을 아끼는 대옥의 마음이 갸륵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보옥은 문득 대옥도 언젠가는 꽃잎처럼 흙무덤에 묻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새삼 그녀의 얼굴과 몸을 바라보았다.

"자, 뭐 하고 있어요? 꽃잎들을 쓸어 담아요"

대옥과 보옥은 꽃들을 쓸어 비단 주머니에 가득 담아 저쪽 밭가에
대옥이 미리 마련해둔 꽃무덤에다 정성스레 묻어주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