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률과 물가가 지수상으로 예상보다 괜찮았던 것말고는 참으로
힘들고 탈도 많았던 한해를 뒤로 하고 마침내 새해가 시작되었다.

예부터 일년지계는 원단에 있다고 했다.

뭔가 달라질 것같은 희망과 기대,뭔가 해보려는 결의와 더불어 맞이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지난해에 국민이 받은 상처가 너무 크고 충격적이었던 데다 앞으로 전개될
정치-경제-사회 상황의 가시거리가 워낙 짧아 불안을 감추기 어렵기 때문
이다.

그러나 불안하고 불확실할수록 더욱 확고한 결의와 자신감으로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우리는 지난날 그렇게 숱한 난관을 극복하면서 여기까지 왔으며 장래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개인은 물론 한 국가의 운명은 결코 정해진 것이 아니고 개척하는 것이다.

1996년 병자년 원단의 결의와 다짐은 역사에서 우선 가닥을 잡아야 한다.

인류가 역사를 중히 여기는 까닭은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가르침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세사에서 병자년은 유별난 의미가 있다.

외침과 강요된 개방의 일대 분수령이 기록된 해들이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임금이 청제앞에 엎드려 삼고구궤의 예로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만든 병자호란(1636년)이 있었고 그로부터 240년 뒤인 1876년
병자년에는 일본 군함의 시위속에 강화도에서 외국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
이자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맺는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는 이제 병자호란의 수난과 병자수호조약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역사
인식을 토대로 전혀 다른 병자년을 설계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굴욕적이고 수세적인 지난날의 역사행적을 되풀이하거나
수용할 우리가 아니다.

연간 GNP규모 4,500억달러의 세계 11위 경제대국, 무역규모 3,000억달러에
육박하는 12위의 무역대국, 1만달러가 넘는 1인당 국민소득은 200개가 넘는
지구촌 국가군속에서 결코 가볍게 넘볼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쉽게 얻어진게 아니다.

더 이상 모멸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무슨 수를 써서든 가난의
굴레에서 영구히 벗어나려는 결의로 팔을 걷어붙였던 기업인 근로자 관리
주부 학생의 피와 땀의 결정이다.

우리의 미래는 세계에 있다.

그동안 쌓아올린 위상과 힘을 바탕으로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한다.

지난날의 타율적-수동적 개방대신 스스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개방에
나서야 한다.

국내시장의 개방을 통해 경쟁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키운 경쟁력으로
미.일.EU의 3극 선진권이 지배하는 세계경영에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국가경영과 기업경영의 사고와 틀, 일반국민과 사회의 인식이 더 넓은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야 한다.

유엔가입 4년만에 2년임기의 안보리 이사국 임무를 떠안게 된 한국외교는
세계평화와 안보를 위해 보다 성숙되고 무게있는 역할을 해야할 순간에
있다.

그러나 우리 국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경제를 더욱 튼튼히 하여 국민이
보다 윤택하고 편하게 살게 하며 이를 세계와 나누는데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은 이미 동남아 개도국에서 훌륭한 모델이 되어 있다.

우리의 외교역량은 기본적으로 경제력에 그 바탕이 있으며 경제협력 외교
에서 특히 그 힘을 발휘한다.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점에는 장래에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1년전 오늘 본란은 세계화의 첨병은 기업임을 강조하면서 "시드니 선언"
으로 설정된 세계화 국정좌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WTO원년의 개방과 무한
경쟁에 대비한 국가전략을 주문한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별로 전진한게 없다.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역사 바로세우기" 소용돌이 속에서 기업인들은
지우기 힘든 상처를 입어야 했다.

기업의욕은 저상되고 투자와 소비심리의 위축으로 세계화는 고사하고 당장
국내경제의 행보가 불안한 상황에 있다.

기업이 활발하게 뛰게 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시장을 무대로 마음놓고 뛸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그 몫은 역시 정부와 정치의 것이다.

그리고 국민이 성원하고 근로자가 가슴을 열고 협력해야 한다.

모든 경제규제는 그야말로 말로만이 아니고 행동으로 철폐되어 기업활동의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

OECD 가입을 시기상조라고 물고 늘어져서도 안되고 기업의 해외투자를
국내산업 공동화란 시대착오적 반론으로 막으려고 해서도 안된다.

경제논리가 정치논리에 눌리는 현상도 이젠 사라져야 한다.

경제는 어디까지나 시장원리에 따라 돌게 하고 정부는 공정한 경쟁확보의
감시자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는 일이다.

국가와 사회가 원칙보다 더 많은 예외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또 기업윤리란 다른게 아니고 기본에 충실한 것, 즉 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국가는 지킬수 있는 법을 만들고 그런 연후에는 모두가 평등하게 예외없이
지키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측가능한 정치와 경제를 확보하는 것이고 우리 기업과
국가가 세계화하고 세계를 향해 뛰고 선진화되는 길이다.

정치와 경제, 기업활동에서 개인생활에 이르기까지 효율과 합리가 제고되고
보다 투명해져야 한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정착으로 금리와 땅값안정, 여기에 노사협력과
산업평화로 임금의 안정을 실현할수 있어야 한다.

앞에 놓인 난관의 실체와 무게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을 훌륭하게 극복
해온 귀중한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서로 아끼고 힘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세계를 향해 힘찬 국가-기업 경영의 나래를 활짝 펼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