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는 나 혼자만 남게 될 거야. 나 혼자만"

보옥이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혼자만 남게 되다니요? 이집에 얼마나 사람들이 많은데요"

습인이 보옥의 손에서 자기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반문하였다.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습인이 너마저 떠나가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어.

결국 가야 할 사람들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데려오지않을 걸 그랬어"

보옥이 화가 난 듯한 얼굴을 하고 울먹이면서 습인의 품에 쓰러졌다.

마치아이가 어머니나 누나의 품에 안기듯이.

습인은 보옥이 주인집 도련님이긴 하지만 그 순간에는 안쓰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여 보옥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리 인생은 언젠가는 다 떠나가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떠나가지 않으려 해도 죽음이라는 것이 갈라놓고 말거든요.

도련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진종 도련님도 얼마전에 떠나갔잖아요.

인생은 일장춘몽이죠.전에 도련님이 저에게 드렬주셨던 그 노래,
그러니까 선녀들이 불렀다는 그 홍루몽같은 거죠"

"홍루몽?"

보옥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피곤한 듯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보옥의 귀엔는 지금도 그 선녀들이 부르던 홍루몽 노래가락이 들려오는
듯하였다.

홍루몽 제8곡에 해당하는 "허화오"라는 노래였던가.

봄날이 지나가면 복사꽃 버들잎도 지고 말거늘 봄날 같은 청춘의
시절 흘러가야만 가을같이 깨끗한 경지에 이를 수 있나 보옥이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워도 그 "허화오" 노래소리는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가난한 몸이 한번 부자가 되어보려 해도 봄에 피었다 가을에 지는
허무한 꽃이여 이것이 인간이 운명이거늘 어찌 피할소냐 어느새 보옥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모든 인생은 떠나가게 되어 있구나.

그런데 죽어서 헤어지는 것보다 살아서 헤어지는 것이 더 마음 아프구나.

습인은 이불을 다독거려 보옥을 잘 덮어주고 침대 옆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보옥은 그렇게 이불 속에서 울고 있는데 습인은 이상하게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습인이 보옥에게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보옥의 마음을
시험해보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습인은 보옥이 집으로 놀러오기전에 어머니와 오빠랑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