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1510~1560)선생은 호남 장성이 낳은 유현으로 영남의
퇴계 이황(1501~1570)선생과 함께 영호남을 대표하는 쌍벽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생은 퇴계보다 9세 연하였으나 24세때 33세의 퇴계와 함께 성균관에서
만나 첫대면에 서로 지기를 허락하여 평생 도우로 지내게 되는데 이때
퇴계가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자 그 이별하는 자리에서 "부자는 영남의
수재로 이태백 두보의 문장과 왕희지 조맹부의 필법을 갖추었다(부자영지수,
이두문장왕조필)"고 퇴계를 극찬한다.

10년뒤에 홍문관에서 두 유현은 다시 마주치게 되고 이때는 하서가 먼저
낙향됨에 퇴계는 전별시에서 이렇게 읊는다.

"나는 예전에 자네와 성균관에서 놀았는데, 한마디 말로 도가 합쳐져
기쁘게 서로를 얻었지(아석여자유반궁,일언도합흔상득)"

이런 인연이 장치 하서의 문인이자 사돈(손자 남중의 장인)인 기대승
(1527~1572)을 통해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에 대한 하서의 의견으로 퇴계와
왕복토론하게 함으로써 조선성리학의 기초를 다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뒷말 대학자이었던 정조대왕은 하서에게 퇴계와 같은 시호인 문정을
추서하고 그를 문묘에 배향한 다음 문묘에 배향된 유형중에서 도덕과 문장과
절의를 겸비한 분은 오직 하서 한 분뿐이라고 극찬한다.

유현이라면 도덕 문장이야 당연히 갖추는 것이지만 절의를 겸비하였다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하서는 인종대왕의 세자 시절에 세자시강원 설서로 인종의 권우를
받았었는데 그 은혜를 잊지 못해 인종승하후 평생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기일에는 반드시 산에 들어가 종일 통곡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기에 절의를 높이 평가한다 하였던 것이다.

그런 분이었기에 그 후손 중에도 그런 가통을 이은 이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으니 그 5대손인 자연당 김시서나 15대손 가인 김병로(1887~1964)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자연당은 숙종때 진경문화를 주도하던 삼연 김창흡(1653~1722) 형제들의
지우를 받던 개결한 선비였고, 가인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의
기초를 다져 놓아 만인의 존경을 받던 법조계의 시조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