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유럽에서는 아직까지 동양인이 이방인이다.

시내를 벗어난 지역의 공공장소에서 동양인이 나타나면 눈빛이 모두
쏠린다.

이들은 동양에서 온 이방인에게 먼저 상냥한 표정으로 "일본에서 왔느냐"
고 물어본다.

"아니다"는 대답이 나오면 조금 표정이 흐트러진 뒤 "그러면 중국인이냐"
고 묻는다.

스무고개식으로 계속 아니라는 대답을 내놓으면 보통 다섯번째쯤의 질문이
지나고서야 어렵사리 한국인임을 알아맞힌다.

중유럽에 대한 한국기업의 직접투자는 일본보다 활발하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 3을 통틀어 스즈키사의 헝가리 자동차 조립공장이
유일한 일본의 직접투자다.

한국기업의 직접투자는 헝가리의 경우 삼성전자 TV조립공장과 한화 라면
공장 등 4건, 폴란드에서는 최근 성사된 대우자동차의 FSO인수까지 포함해서
3건, 체코 1건 등으로 지금까지 모두 8건에 이른다.

투자건수만 많을 뿐만 아니라 투자규모도 이들 3국 정부로서는 국빈급이다.

최근 대우자동차가 폴란드의 승용차메이커 FSO를 인수하면서 앞으로 시설
현대화에 11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폴란드는 물론 체코와
헝가리의 언론들도 톱뉴스로 다뤘다.

시장개방이후 이 지역에서 단일투자규모로는 최대라는 게 비중있게 다룬
이유였다.

이처럼 한국기업이 굵직한 사업들을 터뜨리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일본만 못한 것은 ''한국적'' 진출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삼성 LG 대우 등 한국의 간판기업들은 중유럽의 장막이 걷히기가
무섭게 질주해왔다.

시장조사니 사업타당성점검 따위로 머뭇거리던 일본기업들과 비교할때
진출속도 경쟁에서만은 뒤지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스로 ''미인대회장''이라 부르며 외국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중유럽국가들은 한국 기업들과의 과감한 선택에 대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폴란드 투자유치청의 야브윈스카 지역협력부국장은 "우리는 6개 정부부처가
옥신각신하며 협의해야 할 사안을 한국기업의 경우 최고경영자 한 사람의
직감적 결정이 내려진 뒤 일사불란하게 추진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고
말했다.

신흥급성장 시장에서 이런 빠른 의사결정과 결행능력이 큰 경쟁우위요소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기업들의 진출방식은 대부분 ''수렵형''이지 ''경작형''은 아니라는
게 현지 경제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물불 가리지 않고 얼른 발을 들여 놓은 뒤 투자과실을 한꺼번에 너무 일찍
얻으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지적이다.

수렵형진출에서는 다른 경작자들이 어떤 토양을 개척해야 되는지를 생각할
여지가 없다.

이런 속성때문인지 일본의 기업들과 견주어 중유럽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의 전략적 연대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일본기업들은 경쟁업체라도 먼저 진출한 업체의 시장정보와 마케팅력을
십분활용한다.

한 지역에서 일본기업들간의 경쟁이 벌어지면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분위기다.

이에 비해 이미 포화상태에 있는 시장에서 제살깍기식 경쟁을 주저하지
않는게 중유럽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모습이다.

"폴란드내 연간 TV수요가 17만~18만대 수준이다.

이 좁은 시장에 현재 25개의 현지조립업체들이 경쟁하고 있고 한국의 가전
3사도 경쟁대열에 끼여있다.

판매가 부진하면 가격조정을 통해 밀어내기식 판매에 나설 수밖에 없고
이런 경쟁환경이다 보니까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보다 감춰야하는 형편이다."

모 전자회사의 폴란드지사 담당자의 말이다.

중유럽의 경제개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지난 89년부터 94년말까지
우리나라의 이 지역에 대한 직접투자규모는 실행액기준으로 5천만달러를
밑돌고 있다.

또 북방외교의 바람을 타고 89년부터 91년까지 반짝 투자열기를 보이다가
이후에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교역량도 89년부터 91년까지 3년동안은 88년에 비해 4배가 증가했으나
92년부터 94년(수출 4억7천3백만달러)까지는 증가율이 둔화됐다.

이에 비해 서유럽국이나 미국의 대중유럽 투자및 교역은 91년을 기점으로
더욱 증가하는 양상이다.

자연히 이들 중유럽국에 있어 한국의 비중은 점차 축소될 수 밖에 없다.

투자및 교역비중이 각 나라마다 평균 1%에도 못미친다.

체코의 경우를 보면 89년부터 94년까지 누계 투자금액(31억달러)기준으로
독일의 투자비중이 36.2%를 차지하고 이어 미국 21.2%, 프랑스 11.6%
오스트리아 7% 등의 순이다. 한국의 대체코 직접투자규모는 1천1백만달러로
전체의 0.35%에 불과하다.

그래서 체코인들은 독일의 폴크스바겐과 벤츠의 차는 서로 제품의 질적
차이를 구분하며 구매하지만 현대 란트라(엘란트라의 유럽지역 수출브랜드)
와 대우 에스페로는 똑같이 ''가격은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성능은 우수한
한국산 차''라는 인식을 갖고 구매한다.

어느 한 차의 우수성이 소비자들에게 확인될 때는 다른 회사의 차까지
시너지효과를 얻지만 반대의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부다페스트 시내 가전판매점을 찾아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제품이 삼성
전자 제품이다.

지난 5월부터 삼성전자 헝가리법인은 ''눈높이 켐페인''을 전개, 모든 가전
매장에 삼성제품을 지상 1.4m 높이의 진역장에 설치해 두도록 했다.

또 부다페스트 시내 잠실운동장만한 대형원형경기장의 벽에는 온통 삼성
전자광고로 채색되어 있다.

이런 관고효과로 헝가리에서 삼성전자의 소비자인지도는 대단히 높고 TV와
VTR 등 일부제품은 매달 시장점유율 1위로 집계되고 있다.

LG전자나 대우전자의 브랜드인지도와 판매량도 헝가리에서는 소니나 필립스
에 뒤지지 않는다.

헝가리내 TV시장에서 만큼은 한국의 가전 3사들이 우뚝 솟아 있어 소비자들
에게도 비교평가되면서 판매된다.

그러나 이들 헝가리 소비자들중 상당수가 삼성 대우 LG는 모두 한국의 간판
기업들이라는 것을 모른다.

최근 국민학생을 상대로한 한 시장조사기관의 소비자인지도 조사에서 삼성
이나 대우가 좋아하는 일본기업에 꼽혔다는 사실은 한국인과 한국기업이
이 지역에서 아직까지 이방인으로 남아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중유럽국가에 대한 한국의 진출은 중장기적으로 대서양 연안에서 우랄산맥
에까지 전체 유럽지역 진출을 위한 거점구축과, 값싼 생산비용을 바탕으로
한 제품의 국제경쟁력 확보라는 두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단일 시장만을 바라본다면 규모의 경제라는 기준에서 그다지 큰 매력이
없다는 얘기다.

때문에 진출전략을 수립할 때 어느 지역보다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이
요구되는 곳이 바로 중유럽시장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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