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감의 안내로 후비가 물위에 떠 있는 배에 올랐다.

배에는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쳐져 있고, 그 장막마다 구슬로
꿰어 만든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뱃전을 빙 둘러 갖가지 모양으로 정교하게 만든 화분들이
놓여 있고, 화분에는 각양 화사한 꽃들이 심겨져 있었다.

배의 방향을 잡아주는 키는 계수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노는 목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배가 물결을 따라 미끄러져 갔다.

후비 원춘이 머리를 들어 물가에 심겨진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가지들을
올려다보았다.

정월이라 꽃도 잎사귀도 있을 리 없는 계절이었지만, 희한하게도
그 나뭇가지들에는 꽃도 피어 있고 잎사귀도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가만히 보니 종이와 명주, 비단 조각들로 꽃과 잎을 만들어 붙여놓은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나무마다 불을 훤히 밝힌 크고 작은 초롱들이 걸려 있었다.

배가 지나가는 연못 물위에는 연꽃과 마름, 오리, 백로들이 떠 있었는데,
그것들도 모두 조개껍질과 새털 같은 것으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물위에도 여러가지 모양의 초롱들이 떠 있었다.

물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초롱들과 물위의 초롱들이 서로 경쟁을
하는 듯이 빛나고 있는 모습을 보니,여기가 유리로 만든 세계인지 주옥과
보석으로 만든 세계인지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후비 원춘은 이 모든 것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었으므로
한편으로 어색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후비가 부모님 집에 문안을 드리러 잠시 들른 것 뿐인데 이렇게까지
억지로 화려하게 꾸며놓고 영접할 필요가 있는가 싶었다.

배는 어느새 돌로 만든 수문 안으로 들어갔다.

수문 입구 위에 편액 모양의 초롱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 "요정화서"
라는 네 글자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요정화서는 들꽃이 만발한 물가라는 뜻이었다.

후비 원춘이 그 글자를 보자 빙긋이 웃으며 옆에 있는 태감에게 말했다.

"화서면 되었지 요정이라는 말까지 붙일 필요는 없지.

화서만으로도 꽃이 핀 물가라는 뜻이 되는데"

그러자 태감은 얼른 배에서 내려 둑위에 서 있는 가정에게 후비의 말을
전했다.

가정은 하인을 불러 요정화서라고 적힌 초롱을 화서라고 고쳐 달도록
지시하였다.

하인은 즉시 그 지시대로 이행하였다.

원춘은 요정화서라는 편액을 누가 지었는가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편액 글자를 보자 빙긋이 웃었던 것이었다.

바로 동생 보옥이가 지었음에 틀림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6일자).